[확대경] 日 NEC PC사업 전략 변경 배경과 전망

일본 NEC는 지난 24일 「월드 PC 엑스포 97」 전시장인 마쿠하리메세에 인접한 한 호텔에서 일본 PC역사의 일대 사건으로 기록될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 기자회견에서 NEC는 윈텔(마이크로소프트와 인텔)진영이 제창하는 차세대 규격 「PC98」을 채용한 차세대 PC 「PC98NX」 시리즈를 전격 공개, 자사 독자규격 PC 「98시리즈」만을 사업화해온 기존 방침의 전환을 공식 표명했다.

새 시리즈 PC98NX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차기 PC용 운용체계(OS)인 「윈도98」을 최적의 환경에서 가동할 수 있는 모델로, 윈도98의 출하시기는 내년 4월 이후로 연기됐으나 차세대 표준기종의 한 발 빠른 시판으로 인지도를 높여나가기 위한 전략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차세대 PC규격 채용을 공식 발표한 것은 전세계에서 NEC가 처음이다.

NEC의 이같은 행보는 10년 이상 독자규격인 98시리즈를 앞세워 일본 PC시장의 호랑이로 군림해온 그동안의 「명성」을 버리고 「실리」를 취하는 결정으로, 일본 PC업계에 새로운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다.

NEC의 세키모토 다다히로 회장은 내년이 자사 PC시리즈명 98과 일치하는 해라는 점에 착안해 『98년은 98시리즈의 해』라는 말을 자주 하면서 98시리즈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표시해왔다. PC의 일 국내 베스트셀러 기종이었던 이 시리즈는 세키모토 회장이 지난 82년 출범시킨, 회장으로서는 추억이 깃든 제품이다.

세키모토 회장의 이같은 의지에도 불구하고 일본 PC업계에는 『98년은 (NEC의) 98시리즈 패망의 해』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 배경은 실제로 98시리즈가 DOS/V제품들에 밀려 시장점유율이 급속한 하락세를 보이고 있을 뿐 아니라 마이크로소프트와 인텔이 공동 제창하는 차세대 표준규격이 98년부터 본격적으로 도입돼 NEC 혼자만의 힘으로는 그 흐름을 거역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견해가 주를 이뤄왔기 때문이다.

운명의 장난인지 우연히도 윈텔진영이 제창해 NEC의 노선전환을 부채질한 차세대 PC규격의 이름에도 98이란 숫자가 포함돼 있다. 양 규격이 모두 98을 포함하지만 98시리즈와 PC98은 그 사양이 완전히 상반된다.

현재 세계 PC시장의 주류는 미 IBM이 최초로 공개한 「PC/AT」 사양에 준거한 제품으로 IBM 호환기종이란 별명을 가진 제품이다. 일본시장에서는 일본IBM과 도시바, 후지쯔 등 거의 모든 PC업체들이 이미 이 IBM 호환의 DOS/V 사양 PC를 시판하고 있다. 윈도진영이 아닌 애플컴퓨터를 제외하고는 주요업체 가운데 NEC만이 이 IBM 호환노선에 거리를 유지해왔다. 최근 윈텔이 표방하고 있는 PC98은 이 IBM 호환기의 후속 규격에 해당하는 것으로 지난 4월 처음 발표됐다. PC98의 가장 큰 특징은 NX기술. 이 기술은 하드웨어 설정과 관련해 마우스나 프린터 등 컴퓨터 주변기기를 본체와 연결할 때 컴퓨터 전원을 껐다 다시 켜지 않아도 되며 복잡한 설정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 NEC의 98시리즈는 82년 등장한 이래 애플리케이션 소프트웨어의 풍부함을 무기로 일본시장을 석권해 온 제품. 그러나 PC본체의 호환성을 실현하는 윈도의 등장과 DOS/V를 앞세운 외국 PC업체의 잇따른 일본시장 진출로 상황이 돌변했다.

이후 후지쯔, 도시바 등 NEC처럼 독자규격의 PC를 제공해온 국내 경쟁업체들과 NEC의 98시리즈 호환기를 시판하던 세이코엡슨이 DOS/V진영에 가세하면서 98시리즈는 일본 국내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윈도진영에 홀로 존재하는 독자규격의 PC가 됐다.

그러나 NEC가 지금까지 이러한 시장의 흐름을 읽지 못한 것은 아니다. 이번 노선변경의 주체인 가네코 히사시 사장은 결정이 늦어진 이유와 관련해 『지난 10여년간 축적해온 98시리즈 고객과 98시리즈로 개발된 풍부한 소프트웨어 자산을 포기하기 힘들었고, 최고 실력자인 세키모토 회장이 실적을 거부하는 전략을 편다는 점이 발목을 잡았다』고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사실 NEC그룹 내부에서는 지난해부터 「98시리즈를 고집하면 표준화 움직임에 뒤처져 재기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98시리즈의 독자성은 유지해야 한다」라는 이율배반의 테마를 둘러싸고 격론이 벌어져온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NEC 본사에서는 98시리즈 노선만을 강경하게 지켜왔으나, 관련회사인 「패커드벨NEC재팬」을 통해 DOS/V기종을 생산해 최악의 상황에도 대비해왔다.

NEC 본사는 이번에 DOS/V기종과 98시리즈를 병행 생산하는 「밸런스전략」을 표명했다. 밸런스전략이란 용어는 윈텔규격의 PC사업을 추진하되 98시리즈도 버리지 않겠다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그러나 실제 사업계획을 자세히 살펴보면 98시리즈는 포기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NEC는 윈텔의 PC98 규격 PC를 20개 기종 이상 시판한다. 출시시기를 10월 중순으로 잡고 있는 NEC는 시판 초기부터 새 규격제품의 비율을 70%로 책정해 놓고 있다. 또 내년에는 그 비율을 한층 높여나간다는 계획도 세워 놓고 있다. 따라서 내년 이후에는 사실상 NEC 독자규격인 98시리즈가 시장에서 자취를 감출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번 NEC의 노선변경을 지켜본 업계 전문가들은 NEC가 지난 8월 애플컴퓨터가 숙적 마이크로소프트로부터 경영지원을 받게 된 사건에 큰 자극을 받았을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사실상의 업계표준을 무시하고서는 일본 PC 최대업체인 자사조차도 애플컴퓨터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98시리즈의 명성」이라는 속박에서 벋어난 NEC는 앞으로 PC98NX 시리즈를 기반으로 점유율 재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NEC의 변신을 바라보는 경쟁업체들은 『가장 두려워 했던 날이 왔다』 『먼저 진출한 우리가 유리한 입장이다』라는 등 엇갈린 견해를 밝히고 있으나, 과거의 영광을 포기한 NEC가 무서운 존재로 승화할 것이라는 점에는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심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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