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예로부터 인간들은 인간 상호간은 물론 이 지구상의 모든 사물과 통신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 이를 위해 인간들은 언어와 기호, 문자를 활용하였다. 거리와 시간적인 제약을 벗어나기 위해 인간들은 빛, 연기를 활용하였는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제도화한 것이 봉수통신이었다.
봉수통신은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꽃으로 미리 약정된 신호에 따라 연기와 불꽃으로 신호를 주고받았는데, 외적의 침입 등 국가 비상통신망으로 활용된 통신제도였다.
김지호 실장은 사고 직전까지 보고 있었던 「요람일기」의 내용을 떠올렸다. 「요람일기」에는 봉수통신의 중요성과 역사, 전설적인 한 젊은이의 죽음도 기록되어 있었다.
봉수통신제도의 운영은 수십 리의 일정한 거리마다 높은 산 정상에 봉수대를 설치하고 전방의 봉수의 신호를 후방의 봉수에 전달하게 되어 있다. 봉화는 아무런 일도 없어도 일정한 시간에 봉화를 올리게 되어 있는데, 비가 오거나 안개 또는 구름이 덮여 봉수연락이 불가능할 때는 봉화꾼이 직접 달려가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우리나라 봉수제도의 확실한 성립은 고려 의종 3년(1149) 8월이다. 고려사의 병지(兵志) 의종 3년 3월조 「봉수식정」에는 「서북면병마사 조진약의 상주에 의하여 봉수식을 정하고 평시에는 야화(夜火)와 주수를 각 1, 보통 위급시에는 각 2, 3급(정세 긴박)에는 각 3, 4급(정세 초긴급)시에는 각 4번씩 올리도록 규정하고, 각 봉수대에는 방정(防丁) 2인과 백정(白丁) 20인을 배치하되 그들에게 평전(平田) 1결(結)씩을 지급키로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각 봉수대에서 정세에 따라 봉수를 올리는 방법과 봉수를 지킬 요원의 배치, 그리고 경제적인 배경 등에 대한 규정으로, 이때에 이르러 봉수제도 전반에 관한 확실한 체제가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4거수 방식은 이후 세종시대의 5거수 방식으로 변천되었으며, 우리나라 봉수제도 정형이 되었다. 이와 같은 5거수 방식은 시대적 구분을 할 수 있는 특징으로 나타난다.
그 이후 봉수통신제도는 고려사의 여러 곳에서 나타나지만 원나라의 침입과 지배를 받게 됨으로써 고려왕조의 독자적 봉수제도는 무너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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