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특강] 방송장비시장의 허와 실

방송장비 시장이 급팽창하고 있다. 공보처의 방송사 대거 허가와 뉴미디어 발달에 따라 방송장비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케이블TV 방송의 실시와 민방허가, 위성방송의 실시 등 일련의 뉴미디어 정책으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방송사가 설치해야 할 방송장비 규모는 방송사당 50억∼1백억원에 달한다. 하지만 이처럼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방송장비의 판매 및 설치에 따른 이익금은 거의 외국기업이 챙겨가고 있다.

물론 이런 요인은 국산 방송장비가 거의 없는 탓이다. 공보처의 권고는 방송장비의 국산화율을 65%로 지정하고 있다. 각 방송사는 이에 따라 국산장비의 설치를 적극 수용했으나 실제 도입된 장비를 분석해 보면 거의 국산 브랜드를 부착한 외국장비다. 그나마 핵심장비는 아예 직수입한 것이 대부분이다.

방송사의 장비 국산화율을 65%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핵심장비인 카메라나 VCR 등 고가의 장비는 외국산 장비에 완전 잠식당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가장비 구입에 따른 구매비용이나 로열티는 외국기업의 호주머니로 속속 들어가고 있다. 얼마전 공보처는 각 방송사에 공문을 보내 불법 유통되는 일본산 장비들을 근절시키라고 지시한 바 있다. 그러나 방송일선에서는 카메라를 비롯한 VCR 등 대부분의 장비를 정식 통관되지 않은 제품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방송장비의 품질 때문이라는 것이 방송 현업인의 중론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한국 방송장비시장의 복잡한 양상을 파악할 수 있다.

우선 방송장비의 품질검사 기준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방송사 중 유일하게 검사부가 설치되어 있는 KBS만이 납품되는 국산 장비에 대해 품질기준을 엄격하게 점검하고 있다. 하지만 외국산 장비에 대한 규제장치가 없다. 다른 방송사에서는 그나마 이같은 제도적 장치조차 없어 품질기준에 미달되는 장비들이 버젓이 사용되기도 한다. 방송장비의 품질기준이 없는만큼 고품질의 방송장비와 업무용장비, 국산장비와 외산장비가 서로 뒤엉켜 사용돼 방송품질을 저해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당 6천만∼7천만원을 호가하는 카메라나 VCR를 고집하는 것은 넌센스다. 아무리 좋은 카메라로 프로그램을 제작하더라도 송출 과정에서 품질을 저하시키는 요인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대부분의 케이블TV 방송사 또는 민방에서는 공중파 방송의 영향을 받아 전후사정을 고려하지 않은채 최고급 장비만 도입하고 있다. 최근 일본 도쿄에서 개국한 「MX-TV」에서는 5백만원대 디지털 카메라로 24시간 방송을 하여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무조건 최고급 외산장비 선호 경향으로 외산장비가 잠식한 국내 방송장비시장은 정부 당국의 무책임하고 일관성없는 정책이 크게 작용한 결과이기도 하다. 수입선다변화로 묶어놓은 장비들을 철저하게 막지않은 점이 그렇다. 보도채널은 예외로 하고 기타 방송사들에게는 국산 또는 타국의 장비를 권장한 것도 또다른 이유 중 하나다. 형평성을 잃은 정책으로 방송장비시장은 왜곡되고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겠다는 제작자들의 열정과 성화로 상당수 장비들이 밀반입된 것이다. 정부의 일관성있는 정책이 지속적으로 추진돼야만 빛을 발할 수가 있다. 단기적 처방은 부작용만 초래할 뿐이다. 좋은 품질의 프로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수입금지 정책으로 해결하려한 단견이 실패로 끝난 대표적인 사례다.

장비보급에 따른 반사이익이 거의 외국기업에 돌아가는 또 다른 이유는 단기간에 수많은 방송사가 허가됐기 때문이다. 1년 동안 수십개의 방송사가 등장, 미쳐 국산 장비가 뿌리내리지 못해 절대량을 수입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외국기업의 마케팅전략과 철저한 소비자 관리로 국내 방송장비시장을 완전 잠식한 것이다. 그나마 명맥을 잇고 있는 국산장비의 경우에도 현업자들의 외면으로 점점 더 빛이 바래가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대기업은 몇몇 부품만 생산해 수입장비중 일부만 조립한채 국산브랜드로 공급, 외형상 국산점유율만을 높였을 뿐이다. 이들 장비들은 직수입한 제품보다 고가여서 재정이 빈약한 일부 방송사들이 소위 중간 브로커를 통해 저렴하게 방송장비를 들여오게 한 요인을 제공했다.

국산장비가 정착하지 못한 책임은 우선 국내 재벌기업에 있다. 10여년간 카메라 및 녹화기를 개발해오고 있는 삼성전자가 유일하게 버텨오고 있으나 점유율이 극히 미미하고 LG전자는 방송장비개발팀을 거의 해체한 상태다. 또 대우전자는 일본 소니와의 합작으로 장비를 공급해오고 있으나 방송품질을 위한 프로용 장비가 아니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기업들이 방송장비 개발에 대한 투자보다 이윤 높은 쪽으로 마케팅전략을 선회한 결과가 국산 방송장비의 시장점유율을 낮추어 놓았다. 국제화시대에서 외국기업의 시장잠식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볼 이유는 없지만 국산장비의 점유율이 현저하게 낮은 것은 국가경제의 경쟁력을 잃는 것으로 결코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다. 기업들이 국산장비를 개발하겠다는 의지와 철저한 사후관리가 없는 한 앞으로도 국산장비는 그 토양을 잃을 게 뻔하다. 외국기업이 연간 매출액의 30∼40%를 영업전략 개발에 투자하고 방송사의 불만을 경청하며 즉각 이를 반영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국내업체는 방송사 납품을 위한 저가경쟁에다 충분한 사후관리조차 하지 못한 것을 보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마지막으로 방송장비의 국산화가 이뤄지지 못한 상당한 책임은 방송인이 져야한다. 국내방송인은 무조건 고가장비를 구입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한번 도입한 브랜드를 끝까지 고집하는 현상마저 팽배해 있다. 방송 현업인이 이런 고정관념을 갖게된 배경에는 방송사고시 근무자 본인에게 심한 문책이 가해지고 있는 방송계 풍토와 무관하지 않다. 방송장비는 당연히 고장나는 것인데도 몇만분의 일의 고장에 대비해 이중삼중의 장비 배치에도 신경쓰지 않은 것 자체가 경영인이 방송사고를 용인하지 않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한국방송장비 시장이 봉이라는 것은 외국기업이 이미 간파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도 이제 대책을 세워야 한다. 무분별한 장비 도입은 결국 외화낭비로 직결되고 이 부담은 우리에게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우선 방송사가 앞장서 기술자 양성과 선진기술을 습득하기 위한 투자에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선진기술을 접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는 방송장비전시회 참관이다. 전시회에는 각기업이 심혈을 기울여 각자 개발한 첨단장비를 선보인다. 미국의 「NAB」, 유럽지역의 노하우를 담고있는 네덜란드의 「IBC」, 그리고 일본의 「Inter BEE(국제방송장비전시회)」 등이 세계 3대 방송장비전이다. 올해도 이들 전시회를 통해 발표된 선진기술을 채용한 제품이 곧바로 수입됐다. 전시회에는 첨단기술이 총망라된 제품이 수없이 선을 보인다.

그러나 국내 방송사나 기업은 전시회 참가에 소극적이다. 기업들의 입장에서는 전시회에 참가하여 첨단기술을 파악하거나 세계 각국의 흐름을 익히는 것보다 로비를 통한 장비판매가 훨씬 쉬운 것이 그 이유이고 방송사에서는 선심성 외유로 전시회에 참관하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달 일본 도쿄에서 열린 「Inter BEE 96」에는 한국에서 3백여명의 참관단이 파견됐으나 전시회장을 끝까지 지킨 사람은 거의 없었고 일본업체들은 한국 참관객을 대상으로 치열한 로비활동을 벌인 것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올바른 전시문화가 선진방송기술을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다음의 몇가지가 크게 달라져야 한다. 첫째 방송장비의 구매패턴이 달라져야 한다. 방송사의 장비구매 결정권은 기술자에게 있지 않다. 조달청에 의한 구입과 저가입찰방식이 대부분이고 자재관리부서에 의한 일괄구매방식에 의존하기 때문에 방송기술인의 현업경험과 기술 검토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고 있다. 방송장비구입시 현업자의 기술검토 의견이 크게 반영된다면 기술력 우위의 장비가 서서히 자리잡아나갈 것이다. 방송프로그램은 여러 직종이 만들어 내는 종합예술품이므로 여러분야의 사람들로부터 종합적인 의견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방송사의 졸속 선정과 매각이 사라져야 한다. 방송사를 부의 수단으로 삼아서는 국민의 문화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음은 자명하다. 최근 몇년사이 방송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국민의 문화욕구가 갑자기 증가했는지 몰라도 최근의 방송사 급증은 분명 이상기류이다. 이에 편승해서 자본으로 방송사를 장악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방송이나 뉴미디어 기술에 대한 일고의 가치도 하지않은채 자본을 동원, 방송사 허가를 득한 후 일정시기가 되면 거액의 프리미엄을 맏고 팔아치우는 통탄할 사례가 지금 방송계의 새로운 풍속도로 나타나고있다. 프로그램의 질적 저하와 방송 기술의 수준 저하는 이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셋째 방송장비 성능을 검정하는 공인기관이 필요하다. 방송사의 이해에 얽매이지 않고 순수한 기술력으로 장비의 수준을 검증할 기관의 설립이 시급하다. 난립하는 장비의 도입과 신기술을 채 적응하기 전에 또 신장비 도입을 검토해야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 수백억원의 장비를 도입한 후 몇 년 못가 새 장비로 교체해야 된다는 현실이 안타깝다. 하드웨어의 경쟁보다는 소프트웨어의 경쟁으로 방송사를 살려나가야 할 시점이다.

넷째 실무자 위주의 참관인이 이루어져야 한다. 전시회를 보러 가는 것이 선심성이어서는 안된다. 수많은 장비와 신기술이 난무하는 첨단기술의 경연장을 단 며칠 참관하고 오라는 것부터 무리이며 그나마 간부 위주여서 동행한 일행에게 캐털로그를 수거해오라고 하는 것으로 그치는 참관이 대부분이다. 이런 참관은 지양돼야 한다. 각 직종의 실무자와 현업기술자를 동반하고 정책결정권을 가지는 고급간부가 총괄하여 전시회를 분야별로 참관하고 이를 종합분석하여 장비구매에 반영하는 풍토를 정착시켜가야 한다. 장비도입의 실패는 몇년간 전직원이 노력하여 거두는 수익금을 일시에 탕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공개토론의 장에서 품질이 검증되고 엄격한 기술기준에 통과한 제품이 방송사에 납품되는 풍토를 우리 스스로만들어나가야 된다.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어도 방송장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이를 실현할 수 없고 아무리 좋은 장비를 도입하고자 하여도 기술자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고 로비에 의해 납품된 장비가 계속 쓰여진다면 한국의 방송장비 시장은 앞으로도 외국산 브랜드가 계속 판을 치고 외국기업으로 송금되는 이익금은 커져갈 수 밖에 없다.

<필자약력>

金洪鍊

90년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영상매체 전공

92년 KBS 방송기술인협회장

93년 한국방송기술인연합회장

95년 동아TV 기술부장

현재 한국방송정보협회장

월간 「방송정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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