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14주년특집] 전자산업 대변혁-부품업계 경영혁신

「반도체 신화」가 예상과 달리 힘없이 무너지면서 국내 전자산업에 심한구조변화 바람이 불고 있다. 반도체가 국내 전자산업의 경기흐름에 직접적인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인 침체분위기에 단단히 한몫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듯싶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식」으로 올 들어 반도체 경기부진의 여파가 세트-부품-재료 등 전자업계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위기감으로 사상 최대의 구조조정기를 맞은 부품업계의 현황과 전망을 진단한다.<편집자>

외견상으로 최근 부품업계의 경기침체는 「엔저」에 상당부분 배경을 깔고있다. 지난해 중반부터 엔고가 엔저로 급반전되면서 국산 전자제품이 국제경쟁력을 상실, 수출에 적신호가 켜지면서 재고 증가에 따른 부품구매가 크게감소한 것이다. 역으로 보면 국내 모든 전자업체가 94년부터 지난해 말까지사상 최대의 호황을 누렸던 이면에는 「슈퍼 엔고」로 불릴 정도의 엔화가치초강세가 큰 기여를 한 것이 사실이다.

엔저로 가격경쟁력을 회복한 일본 업체들은 세계 곳곳에서 국산 제품에 치명타를 가하고 있고 부품도 예외일 수는 없다. 무라타를 위시해 TDK, 도킨,NMB, 마쓰시타, 알프스, 교세라, 스미토모 등 일본의 공룡 부품업체들은 공공연히 「한국업체 죽이기」를 선포하며 무차별 공격을 가하고 있다. 일본업체의 득세에는 엔저 못지 않게 중국 및 동남아 현지공장의 정상화에 따른로코스트 제품의 발호도 깊게 작용하고 있다.

일본의 반격과 함께 국내 부품업체들은 중국과 동남아 후발국들의 거센 추격을 받고 있다. 90년도 초반 샌드위치식 협공이 보다 강력한 형태로 재현되고 있는 것.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인도차이나 3국, 인도 등 동남아 국가들은 특히 경제발전을 향한 정부의 강력한 의지에 일본의 기술력을접목, 한국 추격의 보폭을 갈수록 넓히고 있다. 특히 중국은 무한한 노동력,정부의 첨단산업 육성의지, 풍부한 천연자원을 무기로 미국 등 주요 수출시장에서 한국의 강력한 경쟁자로 떠올랐다.

부품업계의 구조변화를 재촉하고 있는 또 하나의 배경은 국내 세트업계의빠른 변신이라 할 수 있다. 제조업 환경의 악화로 국내서 만들어서는 「팔수록 밑진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세트업체들은 글로벌생산체제 구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정책과 맞물려 이같은 세트업계의 해외진출은 최근 들어 가속화 되고 있는 형국이다. 세트업체들의 이탈은 국내부품수요의 공동화를 초래하고 나아가 협력업체의 동반진출 등 각종 구조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세트업체들의 해외생산이 아니더라도 이미 부품업계의 최대 시장인 가전시장은 한계에 도달했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TV, VCR, 오디오 등 20년 가까이 엄청난 부품수요를 창출했던 3대 가전은 가구당 보급률 1백%에 육박하며수요정체가 뚜렷하다. 최근엔 무선호출기 등 일부 정보통신기기까지도 보급률이 한계에 이르며 국내 부품시장의 총체적인 정체현상를 부추기고 있다.

내수 세트시장의 이같은 침체분위기는 그동안 내수 및 로컬에 주력했던 많은부품업체들을 밖으로 내몰고 있다.

부품업계를 나라 밖으로 몰고 있는 이유는 이밖에도 많다. 인건비가 매년급등하고 있고 물류비용, 관리비용, 원자재비용도 계속 상승세다. 최근엔 3D현상의 만연으로 돈을 주고도 생산인력을 구할 수가 없다. 정부가 잇따른 공단조성으로 부품업체를 지방공단으로 몰면서 거주지역과 동떨어진 많은 지방공단의 인력난은 위험수위를 넘어섰다. 이에 따라 최근에는 사람이 없어 해외로 나가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80년대까지만해도 미국, 일본 등 선진국들의 투자적지로 손꼽혔던 국내 제조업 환경이 이처럼 척박해지면서 외투 업체들의 철수도 두드러져 상당수 업체들이 한국을 빠져나가고 있다. 남아있는 업체들도 더 이상의 투자를 자제하고 있거나 지분철수를 추진하고 있다. 한국을 떠나는 외국업체들은 대부분중국이나 동남아를 제2의 해외투자 지역으로 선택하는 것이 상례다. 이로 인해 후발국들의 기술수준이 턱밑까지 쫓아와 국내 업체들을 위협하고 있다.

이같은 국내외의 여러가지 환경변화로 최근 들어서 국내 부품업계에는 「이대로는 안된다」는 인식이 널리 확산되고 있다. 과거의 불황 때처럼 가만히 앉아서 대처하기엔 이번 불황의 성격이 너무 심각하다는 얘기. 대덕전자기획관리실 김희경 부장은 『지금까지 여러차례 불황을 경험했지만 이번만은왠지 감이 좋지 않다』며 『경기 사이클과 일시적인 요인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국내 전자산업의 여러가지 구조적인 모순이 말기의 암처럼 몸 구석구석으로 퍼진 것이란 점에서 근본적인 치유책이 나와야 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현재 부품업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구조변화는 해외진출. 수년 전 삼성, LG, 대우 등 가전 3사의 해외복합화단지 설립 청사진이 나오면서 일기 시작한해외 동반진출을 비롯, 부품업계의 해외진출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많다. 이미 스위치, 콘덴서, 저항, 수정디바이스, 트랜스, 모터 등 인건비비중이 높은 일반부품업계의 상당수 업체들이 해외에 진출했고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심지어 최근엔 PCB 등 일부 장치산업형 부품에까지 해외생산의 물꼬가 터진 상태다.

특히 세트업계의 다국적 생산체제 추구 경향에서 비롯된 부품협력사들의동반진출은 최근 부품업계 판도변화와 세계화의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되며활기를 띠고 있다. 삼성전자의 말레이시아 복합화단지에 남양산업(자석), 한국코아(규소강판코어), 동양전원(트랜스), 대희전자(하네스) 등 9개 업체가진출했으며 북미진출의 교두보인 멕시코 티후아나에는 새한전자(PCB), 경인전자(리모컨), 유림전원(잭), 문성전기(하네스) 등 가장 많은 11개 부품업체가 등록돼 있다. 이밖에 삼성전자와 관련된 부품업계의 동반진출로는 영국윈야드 7개사, 중국 천진 10개사, 청도 5개사, 혜주 6개사 등 전자 3사 중가장 많은 1백개사에 육박하고 있다.

멕시코, 인도네시아, 중국 등에 전자복합화단지를 조성 중인 LG전자 역시상당수의 부품업체를 동반진출 형식으로 해외로 적극 유치하고 있다. 멕시코법인(LGEMX)이 성문정밀(D 코일), 유림전원(쉴드박스) 등을 포함, 1차로 8개사를 유치할 계획이며, 인도네시아에는 삼화텍콤(트랜스), 원우정밀(프레스부품)에 이어 올해 말까지 모두 10개사를 불러들일 계획이다. 이밖에 북경,천진, 심양 등 여러곳에 전자단지가 구축되고 있는 중국에 남양전자(코일),삼영전자(전해콘덴서), 한국트랜스(트랜스), 삼일부품(노이즈필터) 등 11개업체가 나가 있고 2개 업체가 추진 중이다.

베트남 진출을 시작으로 최근 해외 복합생산기기 구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대우전자와 관련해서도 베트남에 아신전자, 세화산업 등 기초부품을 중심으로 5개 업체가 진출해 있다. 이밖에 멕시코에 연호전자(하네스) 등 7개업체, 중국에 새한정기(데크메커니즘), 지영사(트랜스) 등 9개 업체가 진출한것을 비롯, 현재 대우를 겨냥해 해외로 나간 부품업체는 7개국 25개 업체에달한다. 대우는 앞으로도 베트남, 프랑스, 영국 등에 대규모 신, 증설 형태로 전자단지를 구축, 해외협력업체를 50개 이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날로 경쟁력을 잃고 있는 범용부품의 생산기지 이전과 함께 국내 생산품의고부가화, 신규 품목 또는 완제품으로의 사업다각화도 현 부품업계 구조변화의 대표적인 흐름으로 나타나고 있다. PCB에서 출발해 부품과 세트의 중간사업인 PCB조립사업과 부품의 전 단계인 재료부문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는 코리아써키트를 필두로 통신부품 전반으로 사업을 확장한 태봉전자(튜너), 통신장비부문의 다크호스로 부상한 유양정보통신(HIC), 자기헤드업체에서 종합전자업체로 변신한 태일정밀, 대기업 M&A에 의해 각각 통신기기업체로 탈바꿈한 한솔전자(데크, 튜너)와 엔케이텔레콤(스피커), CD체인저 완제품사업에뛰어든 새한정기(데크) 등 부품업계의 사업다각화는 커다란 흐름이다.

기존 부품기술을 활용, 유관 부품으로 사업영역을 넓히는 경우도 늘고 있다. PCB 반제품인 매스램을 전략 육성 중인 두산전자(PCB원판), 저항기술을활용해 센서사업을 추진 중인 아비코와 한륙전자, 스위칭기술을 이용해 센서, 리모컨사업을 활성화하고 있는 경인전자, 자동차부품에서 자동차 장비까지 폭넓게 커버하고 있는 대성전기, 페라이트코어 기술로 전자파흡수체를 상용화한 삼화전자, 전지 응용제품인 2차전지팩 사업을 강화하고 있는 로케트전기를 비롯해 상당수 업체들이 변신을 위해 꿈틀거리고 있다.

대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신규사업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자구책으로 부가가치가 낮은 사업을 정리, 축소하는 것도 현재 부품업계의 주된 움직임 중의하나. 이는 불황때일수록 여러가지 품목을 병행하는 「포트폴리오」식 경영보다는 「될성싶은 품목에 집중한다」는 고부가화 지향의 경영방침과도 일맥상통한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부품업체들은 생산기지의 해외이전으로도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려운 폼목을 과감히 정리하는 한편 국내공장을 전략품목개발 및 생산축으로 개편하는 생산구조 조정에 적극 나섰다.

가전을 대체할 정보통신, 자동차, 산전 등 차세대 빅3시장에 대한 대응력을 높일 수 있도록 개발 및 마케팅의 방향을 빠르게 전환하고 있는 것도 최근의 혼란기를 겨냥한 부품업계의 능동적인 대책 중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이 중에서도 무선호출기, 휴대폰, 노트북PC 등으로 대변되는 이동통신기기시장은 장차 CT2, PCS, TRS 등으로 이어지며 침체의 늪에 빠진 가전시장을 대체할 부품업계의 주 타깃으로 확실하게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응,부품업계는 경박단소형 이동통신기기에 주력 채용될 SMD타입의 초소형 부품개발 및 양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2차전지, 고주파부품, 초박판 PCB, 초소형 모터 등 이동통신 전용 부품시장도 주목받고 있다.

새로운 유망시장으로 부상하고 있는 자동차용 부품시장을 겨냥한 전략적인중심전환도 활발하다. 이미 PCB업계는 카오디오를 비롯해 ECU 등 각종 전자제어장치에 채용될 자동차용 PCB시장을 크게 주목하고 있으며 자석 및 소형모터업계도 폭발적으로 늘어날 DC모터와 DC모터용 페라이트자석시장에 대한마케팅을 강화하고 있다. 특히 센서업계는 자동차의 고급화에 따라 속도 및위치감지센서, 가스센서 등 센서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것에 착안, 자동차용센서 연구개발에 주력 중이다. 이밖에 제조라인의 무인화를 위한 CNC컨트롤러가 기계장치에 대거 장착되면서 산전시장 또한 부품업계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된다.

부품업계는 이밖에도 현 불황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구조조정기에 낙오되지않기 위해 해외수출을 로컬 중심에서 직수출 중심으로 전환하기 위해 ISO 9000시리즈 인증, 기업 체질개선, 품질지상주의 정책, LAN, 인터넷 등 정보화구현, 원가 자체흡수를 위한 관리비용의 절감 등 대각적인 대책마련에 착수했다. 대부분의 부품업계 관계자들은 『비 온 뒤에 땅이 굳듯이 이번 불황과구조조정기를 통해 국내 부품업체들이 21세기 무한경쟁시대에 보다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이중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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