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컴퓨터 파노라마 (30);방황기 (5)

81년 3월 25일에 치른 제 11대 총선은 우리나라 컴퓨터 역사에도 중요한의미를 부여한 큰 사건이었다. 사상 처음으로 KBS가 총선개표 전산시스템을도입, 이날 저녁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된 개표과정을 10시간 동안 TV로생중계했던 것이다.

물론 이날 사람들이 감탄한 것은 TV가 아닌 컴퓨터의 위력이었다. 80년을전후해 최고 잘나가던 미국 프라임사의 중형컴퓨터 「프라임750」을 호스트로 삼은 총선개표 전산시스템은 전국 2백43개 개표소에서 쉼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중간개표 결과를 실시간으로 처리, TV화면에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컴퓨터와 방송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날 방송은 또 개표 데이터를 「정당별 득표현황」이나 「당선확실」 등 시청자들의 다양한 정보욕구를 충족시켜주는 형태로 재가공해 시청자의 놀라움을 자아냈다.

이날 개표방송의 하이라이트는 초반 밤 10시부터 시작된 후보들간 밀고 밀리는 당락에 대한 접전이었다. 11시부터 새벽 2시까지 계속된 제주선거구에서 2위를 놓고(중선거구였으므로) 변정일 후보와 강보성 후보가 90표차 안팎으로 엎치락뒤치락했던 싸움은 압권이었다.

하지만 전국 92개 선거구에서의 당락 윤곽은 새벽 1시에 거의 드러났다. 70년대까지만 해도 개표 후 12시간 이상 소요되던 작업이었다.

KBS가 프라임750 공급회사였던 한국전자계산(KCC)과 공동개발해 이날 선보인 총선개표 전산시스템 응용프로그램은 20종에 이르렀다. 「선거구별 개표현황」 「정당별 당선자 및 상위득표자현황」 「정당별 득표현황」 「투표율현황」 「연령별·학력별·직업별 당선자 및 후보자 분석표」 「최소·최다득표 당선자 현황」 「전국구 의석 배분표」 「정당별 당선자 수 예상표」「정당별 공천자 당선율 현황」 「최근소 표차」 「최연소 및 최고령 당선자」 「당선확실지역 및 후보자」 「최근소 표차 당락지역」 「정당별 상위 득표자 유망자」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었는데 오늘날 TV방송사들이 선거개표방송 때마다 경쟁적으로 선보이는 기상천외한 응용프로그램의 전형은 이미 이때 마련됐음을 볼 수 있다.

선거를 치르고 나서 개표결과를 빨리 알고 싶은 일반인들의 욕구는 지금이나 예나 다를 바가 없을 터였다. 또 그 결과를 다른 매체보다 빨리 알리려는언론사들의 보도경쟁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80년 9월 11대 대통령이 취임하고 5공화국 출범을 위한 제8차 개헌 국민투표와 총선일정이 잡히면서 KBS는 비로소 처음으로 컴퓨터에 의한 선거개표방송 아이디어를 냈고 곧 이어 준비작업에 나선다.

70년대 말까지 컴퓨터를 이용한 TV개표 생방송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체적으로 개표나 집계용 컴퓨터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는데 라디오방송이나 신문조차도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개표와 집계를 완료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결과를 받아서 보도하는 데 그쳤다. 따라서 중앙선관위의 작업이 늦어지면 투표율이나 후보 당락소식도 그만큼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더 아이러니한 일은 중앙선관위조차도 컴퓨터 장비를 갖추지 못했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투표 때마다 선관위는 유선망을 통해 전국의 개표소로부터 일일이 결과를 수집해 집계한 후 이를 언론사에 제공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이날 저녁 자정을 전후하면서 총선개표 전산시스템이 위력을 발휘하자 그때까지 중앙선관위에서 개표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신문·방송기자들이 우르르 KBS전산실에 몰려들었다. 당시 KBS 전산실장이던K씨의 회고.

『새벽 1시경이 되자 시청자들의 문의전화가 빗발쳤어요. 어느 지역 어느후보의 현재 득표현황을 알고 싶다는 것 등이었는데 전산실 직원들이 전화기를 손에 든 채 다른 손으로 키보드를 두드려 가면서 일일이 대답을 했습니다. 나중에는 KBS 라디오쪽에서 전산실로 쳐들어오더군요. 리포터가 다짜고짜 디스플레이 화면을 보고 그대로 마이크에 읽어대는 겁니다. 뒤이어 선관위에 있던 신문사 기자들이 몰려와 보고 적는데···. 내 자신이 그렇게 자랑스럽기는 처음이었습니다.』

물론 KBS와 문화방송 등 방송사도 81년 3월 제 11대총선 이전까지만 해도방송제작용은커녕, 일반 업무처리용 컴퓨터시설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다. KBS의 경우 78년부터 일부 자체업무를 전산처리하고 있었지만 전산실 조직만 갖추었을 뿐 컴퓨팅 파워는 KCC에서 시간단위로 임대해 사용하는 형편이었다. K씨의 얘기를 다시 들어보자.

『전산실에는 24명이나 되는 직원이 있었지만 KBS 경영진은 월 임대료가 1천만원이 넘을 때까지는 자체 컴퓨터를 도입하지 않기로 못을 박아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던중 시청료 징수·자재관리·인사·급여·해외 방송송출 등의업무가 폭증하고 81년부터는 방송제작 관리를 전산화한다는 방침을이 우면서자체 컴퓨터 도입이 추진됐습니다. 이 방송제작 관리 전산화 부문에 총선개표 전산시스템 개발내역이 포함돼 있었던 겁니다.』

선거개표 전산시스템은 이미 70년대말 미국 TV방송사 사이에서 도입돼 그위력을이 발휘하고 있었다. KBS는 이 위력에 상당한 공감을 가졌던 데다 문화방송과 시청률 경쟁에서 앞서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추진일정에 따라 KBS는 그동안 컴퓨팅 파워를 임대해오던 KCC를 통해프라임750을 80년 말까지 도입키로 했다. 또 총선 사흘 전까지 선거개표 전산시스템 개발을 완료한다는 방침을 굳혀놓고 있었다. 모든 시스템의 개발은KCC가 맡아서 하기로 했다. 그런데 추진과정에서 의욕이 지나친 나머지 결정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전산실장 K씨의 회고.

『전산실 입장은 어차피 개발해야 될 시스템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앞당겨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제 8차 개헌국민투표를 불과 두달여 앞둔 시기였는데이왕이면 총선에 앞서 국민투표용 시스템부터 개발해보자는 욕심이 생겻습니다. KCC측에 이 작업이 가능한가를 타진해보니 충분하다는 겁니다. 자체시설없이도 KCC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죠. 유관부서에 이 계획을 알리고 관련자료 준비 등 사전 정지작업에 한달을 보낸 다음 선거를 20여일 앞둔 10월초부터 본격적인 개발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개발된 국민투표용 개표전산시스템은 방송에 사용되지도 못한채 개표를 불과 몇 십분 앞두고 치명적인 사고를 내고 말았다. 시험중 정전사태가 발생했는데 백업체제를 갖추지 못했던 개표전산시스템 데이터베이스가 한순간에 파괴돼 버린 것이다. 당시 KCC의 기술담당 상무였던 L씨의 회고.

『국민투표 개표전산시스템 개발은 KCC나 KBS 모두 구체적인 계획없이 막연한 기대감으로 시작했던 것이었습니다. 시스템 개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경험인데 이를 무시했던 겁니다. 기계(컴퓨터)의 신뢰성을 너무 맹신했던 것도 실패의 한 요인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프라임기종의 명성은 중형컴퓨터 분야에서 IBM을 능가하고 있었으니까요. 설마 전기 쇼크로 시스템이 파괴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거죠.』

사실 시스템이 다운된 가장 큰 이유는 당시 우리나라에 공급되던 전력의품질이 매우 불량했기 때문이었다. 전압이나 전류 흐름이 고르지 못했는데은행 온라인 시스템 등의 80% 이상이 이런 이유로 다운됐다. KCC측의 잘못은바로 이같은 돌발상황에 대비해 처음 설계부터 백업체제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점이다.

국민투표용 개표전산시스템의 실패는 KBS측에 큰 충격을 줬다. 전후관계를알지 못했던 KBS측은 즉각 81년의 총선개표 전산시스템 개발에 난색을 표명하고 나섰다. 개표작업은 적어도 10시간 이상 계속될 터인데 이같은 사고가생방송중에 발생하면 방송사 이미지 추락은 불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일이 이쯤되자 KCC는 자체 조직 안에 「KBS지원 긴급대책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어 총선개표 전산시스템 개발에 기업사활을 걸겠다고 다짐하고 나섰다. 여기서 포기하면 국내에서 가장 잘나가던 프라임 기종의 신뢰도에 먹칠을 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사업에 주력해온 회사 경영전반에 큰 타격이가해질 상황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KBS 전산실이 KCC와 공동으로 총선개표 전산시스템 개발팀을 재구성한 것은 80년 12월이었다. 단서 조항이 붙은 것은 아니지만 만약또다시 실패할 경우 KCC는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는 각오였고 KBS 전산실도여차하면 사표를 제출하겠다는 다짐을 거듭한 결과였다. 이같은 각오와 다짐덕택으로 시스템개발은 예정대로 선거 사흘 전에 완료돼 프롬프트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때 개발된 총선개표 전산시스템은 프라임750 호스트와 프라임550 백업장치, 3백MB급 디스크장치 3대, 마그네틱테이프장치 2대, 프린터 2대 등을 비롯, 5대의 디스플레이 단말기, 2대의 그래픽 단말기, 10대의 데이터입력 단말기 등으로 구성됐다. 시스템은 서울본사 산하 8개 지방국을 중심으로 2백43개 개표소를 유선망으로 직접 연결한 것이었다.

81년 3월 25일의 총선개표 전산시스템에 대한 관심은 컴퓨터가 단순히 선거개표방송의 백본으로 사용됐다는 의미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반인들은 그렇다치더라도 컴퓨터업계와 방송계 인사들은 제 11대 총선 선거개표 전산시스템의 가동상황을 지켜보면서 장차 있게 될 컴퓨터와 TV방송의 결합을 나름대로 그려봤던 것이다. 국내에서 TV프로그램 제작 및 방송에 컴퓨터장비가사용된 것도 공식적으로는 이 선거개표방송이 처음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서현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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