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컴퓨터 파노라마 (22);도약기 (8)

전경련 보고서와 과학기술처

70년대 후반은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우리나라 최대의 경제단체로부상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제4공화국 정부는 수출 확대에 혈안이 돼있었고 그 결과 75년부터 79년까지 연평균 수출증가율은 28.8%에 이르렀고수입증가율도 22.9%나 됐다.

목표보다 3년 앞선 77년에 수출과 수입이 모두 1백억 달러를 넘어섰고 1인당 GNP도 1천 달러를 돌파하자 4공화국의 「수출입국」과 「고도성장」정책의 홍보는 절정에 달했다. 수출과 수입의 최일선에 있는 1백50여개 기업을회원사로 거느리고 있던 전경련의 입지가 급상승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70년대 우리나라 경제 전반에 막강한 배후로 부상한 전경련이 도약기에 접어든 컴퓨터 분야에 첫 一聲을 가한 것은 78년 9월이었다.

이때 전경련은 「기업경영과 정보산업」이라는 자체 연구보고서를 통해 정부 측에 장기적인 정보산업 육성발전 방안 마련을 촉구하고 나섰다. 그 대안으로 「정보산업육성법」의 제정을 주장했고 과학기술처와 상공부로 이원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는 정부의 정보산업 분야 정책 수립과정을 일원화 하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언론에 보도된 이 보고서 내용은 과학기술처와 상공부 관료들 사이에서 적지않은 파장을 불렀다. 전경련이 이같은 연구보고서를 작성한 저의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전경련이 성장일로에 있는 우리나라 정보산업을막강한 경제력으로 주도하겠다는 발상일 수도 있었다.

게다가 보고서의 각론 가운데는 관료들뿐 아니라 업계에까지 파문을 일으킨 몇 가지 문제된 내용도 들어 있었다. 그 대목을 요약해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선진국일수록 컴퓨터산업이 고도로 발달돼 있고 컴퓨터 기종도 중·대형에서 초대형이나 미니·마이크로 컴퓨터급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중략....컴퓨터의 국산화는 부품의 생산 단계에서 실시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중략...그러나 기술동향이 자주 바뀌는 상용컴퓨터를 국산화한다는것은 비생산적이다. 국산화 제품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기존의 컴퓨터를 외국에서 수입해 오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바람직 하다...』

이런 대목은 당시 컴퓨터 국산화에 사력을 걸고 있던 많은 기업들과 연구소 관계자들의 분노를 샀다. 대다수 국민들의 정서에도 맞지 않는 내용이기도 했다. 의외의 반응이었다고 여겼던지 전경련 측이 『컴퓨터를 도입하려는기업 입장에서 보면 생산활동에 당장 투입돼 생산성 향상을 꾀할 수 있는 컴퓨터가 필요한 것 아니냐』며 한 발자국 물러섬으로써 문제는 더 이상 확대되지는 않았다.

전경련의 이같은 해명은 그러나 업계의 파장만을 잠재웠을 뿐 과기처와 상공부 관료들 사이에서 여전히 뜨거운 감자로 남아 있었다. 전경련의 보고서를 대하는 두 부처의 시각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전경련의 보고서는 정보산업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경쟁을 벌이고 있는 과기처와 상공부 사이를 교묘하게 오가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이를테면 어떤 대목에서는 과기처의 입장을 대변했다가 다른 대목에서는 상공부의 정책과정을 두둔하는 식이었던 것이다.

앞서 소개한 내용 가운대서 이를테면 『부품국산화..』 운운하는 부분은상공부 정책을 대변하는 것이었다면 『...수입해 오는 것이 바람직...』운운은 당시 컴퓨터 도입(수입) 심사를 총괄하던 과기처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고있는 셈이었다.

과기처의 경우 이미 67년부터 차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전자계산조직개발조정위원회를 설치, 국내에 수입되는 모든 컴퓨터의 도입(수입) 심의를 전담하고 있었다. 과기처는 바로 이같은 도입 심의를 통해 국내 정보산업정책에 막강한 힘을 발휘해 오던 터였다. 당시 전경련 사무국 소속이었던 Q씨의 회고.

『수출입 주역이던 회원사들의 당면 목표는 당연히 생산성 향상에 의한 국제경쟁력 제고였습니다. 컴퓨터 도입이 절실했던 거죠. 그런데 컴퓨터 도입을 권장하는 과기처와 달리 상공부는 수입억제와 국산화에 주된 관심을 보였습니다. 연구보고서 작성은 이같은 극단을 돌파함으로써 회사들의 권익을 보호한다는 취지로 시작된 것이죠.』

당시 상용 컴퓨터의 99%가 IBM·후지쯔·스페리 등 미국과 일본제품이었다는 점에서 기업의 컴퓨터 도입은 곧 수입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무역수지를 관리하는 수출입 주무부처로서 상공부에게 과기처의 컴퓨터 도입확대정책은 적지않게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다. 수출 1백억 달러를 기록한 77년만해도 5억 달러 미만이던 적자가 78년 상반기에만 벌써 15억 달러가 넘어서던상황이어서 여간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참고로 78년 우리나라의수출액은 1백27억 달러, 수입은 1백49억 달러였다) 이런 배경 때문에 상공부는 무역수지 균형관리 차원에서 국산화에 대한 다양한 계획을 발표했고 한국전자공업진흥회와 한국전자기술연구소와 같은 단체 및 연구소에 대한 지원도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두 부처의 당시 정보산업 관련 조직을 보면 과기처의 경우 이미 局단위인정보산업국을 두고 있었다. 정보산업국은 컴퓨터도입 승인업무 등을 위해 71년에 설치된 정보관리실이 확대 개편된 조직이었다.

반면 상공부는 83년 5월 직제 개편에 따라 정보기기과가 설치될 때까지 독립된 조직 없이 전자기기과에서 복사기나 계측기 등 다른 산업전자와 함께컴퓨터 관련 정책을 일괄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공부는 69년 시작된 전자공업진흥8개년 계획의 성공적 수행에 이어 76년 한국전자기술연구소 등에 출연하면서 부터 컴퓨터 하드웨어 국산화에 강한 집념을 보여오고 있었다. 전경련 사무국 소속이었던 또다른 Q씨의 회고.

『사실 전경련으로서는 두마리 토끼를 다잡고 싶었습니다. 정보산업이 미래산업으로 부상하고 있는 만큼 회원사들 역시 언젠가는 컴퓨터 생산자로 변신해야 된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죠. 장차 전경련의 입지도 다질 필요가 있겠다는 측면에서 보고서 말미에 첨부한 대목이 바로 하드웨어는 수입하되 소프트웨어는 국산화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정부조직 내에 개발전담기구를 두고 여기서 개발된 소프트웨어를 상품화할 민간회사 설립이 시급하다는내용이었죠.』

그런데 전경련이 두 마리 토끼를 쫓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동안 실마리는의외로 간단하게 풀려버렸다. 보고서가 나온 지 1백여일 만인 79년 1월 과기처는 전경련의 「기업경영과 정보산업」보고서의 주장과 대부분 일치하는 내용의 정보산업 육성책을 발표한 것이다.

우선 정보산업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조세·자금·행정지원을 강화하기위한 정보산업육성법(가칭)을 제정하는데 그 골자는 기존의 각종 법규를 단일화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부품단위 부터 단계적으로 컴퓨터를 국산화하며소프트웨어 개발을 촉진시켜 수출산업으로 육성하겠다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

부품단위부터 국산화하겠다는 것은 당분간 컴퓨터 수입을 지속하겠다는 의미여서 관계자들의 주목을 끌었다. 이같은 과기처의 컴퓨터도입 지속정책은그후 8개월 후인 79년 9월에 「전자계산조직 도입심의기준」이 마련됨으로써보다 강화되고 구체화됐다. 그런데 이때 마련된 「...심의기준」의 기본 지침을 보면 외국영화 수입쿼터제와 유사한 면을 볼 수 있는데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그 단적인 예였다.

『중형급 이상 컴퓨터 도입은 과기처 장관이 인정하는 컴퓨터 국산화 또는국내 전자산업 발전에 기술기여도가 높은 업체에 공급우선권을 부여한다. 단국방·안보·방산용이나 기타 과기처장관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는 예외로 한다.』

아무튼 과기처는 상공부보다 앞서 정보산업 육성정책을 발표, 정보산업 주도권 경쟁에서 상대방 기선을 제압할 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전경련은 과기처에 이론적 무장의 계기를 제공한 셈이 돼 버렸다.

한편 과기처의 정보산업 육성정책이 발표된 지 한달 만인 79년 2월12일 전경련은 산하 회원사 협의체인 정보산업협의회 창립발기인대회를 갖고 회장등 협의회 임원을 선출하게 된다. 정보산업 육성이 시금하다는 「기업경영과정보산업」보고서 내용를 실천에 옮긴다는 명분과 함께 기업경영의 과학화가이 협의회 운영 목적이었다.

그러면서도 정보산업협의회는 세부추진 우선목표로 정보산업의 기반조성사업을 제시, 전경련의 정보산업진출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 놓고 있었다.

이날 임원 선출에서는 회장에 원영섭(혜인중기 회장)을 비롯해 부회장에강진구(삼성전자 사장)·강신호(동아제약 사장)·구두회(금성통신사장)·한상준(KIST 소장)·우용해(쌍용양회 사장)·정주영(현대건설회장) 등 이 추대됐다. 한상준을 제외하면 모두 전경련 회장단 소속이었다.

이렇게 출범한 정보산업협의회를 4년 후 계승한 단체가 바로 오늘날의 한국정보산업연합회이다. 83년 5월 전경련에서 독립, 정주영을 초대회장으로하고 과기처의 산하단체로 출범한 한국정보산업연합회(당시는 한국정보산업협회)는 지금도 기업경영의 과학화 등 정보산업협의회가 추구했던 명분과 목적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서현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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