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관람석]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다섯의 인물이 있다. 하루살이 날벌레처럼 음습한 서울 뒷골목을 불안하게

날고 있는 이들은 서로 갈증의 신호를 보낸다. 그러나 그 신호는 개인의 절

박함에도 불구하고 상대에게 제대로 읽혀지지 않는다. 묵살당하는발신음, 그

곳에 절망이 있고 고통이 있다.

홍상수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목표점에 가 닿지 못하는 인간

의 신호에 대한 리포트이다.자존심은 강하나 궁색하기 딱이 없는 노총각소설

가 효섭(김의성 분), 그를 사랑하여 외도를 하는 유부녀 보경(이응경 분),결

벽증이 심한 걸 빼고는 평범한 샐러리맨인 그녀의 남편 동우(박진성 분),소

설가 효섭의 아내가 되는 게 꿈인 3류극장 매표원 민재(조은숙 분), 그리고

민재에게 줄기차게 구애하는 극장 경비원 민수(손인석 분)가 그들이다.

감독은 그들의 불완전한 신호를 각 인물의 하루동안을 지켜보는 것으로 읽

어낸다. 그래서 영화는 4개의 에피소드, 즉 효섭, 동우, 민재, 보경의 하루

가 등뼈의 마디로 이어진다.

갈증의 신호, 진실의 신호가 실체에 닿지 못할 때 그 회로는 늪이고 수렁

이다. 다섯 인물은 그래서 저마다의 수렁에 빠진다. 마치 굶주린 돼지가 이

곳 저곳 헤매다가 깊은 우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쥐꼬리만한 원고료를 못받고 문학 동호인 모임에서 주정을 부리다가 즉결

에 넘어가 구류 7일을 살게 되는 효섭, 출장지에서 콜걸과 정사를 벌이다 콘

돔이 찢어져 성병 강박증에 빠지는 동우, 효섭의 배신을 확인하고 홧김에 민

수에게 몸을 주는 민재, 효섭과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이려다 소매치기에게

돈을 다 털리고 쩔쩔매는 보경은 우리가 흔히 보고 듣는 일상성 속의 인물들

이다.

일상의 삶을 갈증의 신호체계로 읽어낸 감독의 시각과, 필연성의 틀에 갇

혀 뻔한 결말을 향해 지리하게 치닫는 한국영화의 몰개성을 과감히 벗어던진

용기가 신선하다. 신예다룬 파격과 낯섬으로 방화의 고여있는 우물에돼지 한

마리를 풍덩 빠뜨린 홍상수감독에게 일단 박수를 치고 싶다. 그리고, 고립된

섬으로 떠도는 인간 존재들의 발신음을 「돼지의 비명」으로만 읽어야 할 것

인가를 고민하라고 주문하고 싶다.

<박상기(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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