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정보통신 비사 소리없는 혁명 (44.끝)

1980년대의 전화혁명은 이처럼 1970년대 후반부터 그 싹이 트기 시작했다.

전자교환기의도입이 한 예이고, 전화망의 현대화계획이 그렇고, 또 대량공급을 뒷받침한 투자재원의 마련이 그렇다. 그렇다면 한국통신이 발족하지 않았다 해도 전화혁명이 가능했을까? 역사에는 가정법이 있을 수 없으므로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우선전화 대량 공급의 주역들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자.

"한국통신이 발족하지 않았더라도 기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느 정도 가능성은 있었을 겁니다. 1979년부터 전화적체 해소를 위해 근본적으로 필요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고, 또 전화교환방식을 전자교환방식 으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물론 한국통신이 발족함으로써 예산회계나 재무관리면에서 국가가 직접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융통성이 있기 때문에 과거 1년에 60만~70만대 공급하던 전화를 1백만~1백50만 대씩 공급할 수 있었죠. 따라서 한국통신이 설립됨으로써 더 빨리 전화 적체 를해소할 수 있었던 거죠."(윤동윤 통신정책국장) "사전에 준비도 했지만 공사화가 됐기 때문에 그만큼 쉽게 이뤄진 겁니다.

관청조직이나 관청 회계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아마 관청 조직을 가지고 추진했다면 도중에 손들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전자교환기와 공사화가 서로 상호 보완이랄까 승수효과를 가져왔다고 이야기할 수 있죠."(정규석 차관 "전자교환기 때문에 대량 공급이 가능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러한 물량 적인 요소보다 공사화가 됐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겁니다. 연간1백만회선 공급계획은 이미 70년대말에 이뤄졌지만 공무원체제로 남아 있었다면 사실상 어려웠을 겁니다. 아무리 자금이 있고 물자를 차관으로 들여온다 하더라도 사람 문제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공사화가 되고 나서 사람들이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신분이 바뀌고 보수가 올라간 것이중요한 이유가 되겠습니다만, 많은 직원들이 숨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게 원동력이 되었다고 봅니다.

물론 거기에 전자교환기가 따랐기 때문에 대량 공급이 가능했겠지만, 전자 교환기만 들여와도 안되는 거고 공사화만 되었다 하더라도 기계식교환기만 가지고는 안되는 거죠. 그런데 양자간에 타이밍이 잘 맞아떨어졌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가능했던 겁니다."(이희두 한국통신 시외전화사업본부장)한국통 신의 설립을 추진하면서 체신부가 내세운 가장 그럴듯한 명분은, 첫째가 행정기능과 사업기능의 분리였고, 둘째가 관청조직이 지니고 있는 예산.

인사.조직관리상의 경직성 탈피였다. 전자는 체신부가 그동안 전화 적체 해소 등 현안문제의 해결에 급급한 결과 전화수급을 위한 중장기계획, 새로 운서비스 및 기술개발 등 보다 차원놓은 기획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는반성에서 체신부는 정책기능을 담당하고 사업기능은 신설공사에 맡기자는것이었고 후자는 관청조직이 안고 있는 속박의 틀로부터 벗어나자는 것이었다. 전기통신사업은 통신사업특별회계로 운영되고 있었으나 예산은 경제기획원 에의해, 정원 및 조직의 변경은 총무처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전화수리원 한명을 증원하는데 2년이 걸렸고 또 트럭 한 대를 사는데 2년이 걸렸다.

또 공무원의 보수체제로는 우수한 기술인력을 확보할 수 없었다. 또한 감정원의 감정가격으로는 전화국을 지을 땅을 살 수 없었고 경제기획원이 책정 한건축공사비로는 건물을 지을 수도 없었다. 때문에 이러한 틀에서 벗어나는길은 관청체제에서 벗어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런데 공사가 설립되고 나자 즉각 약효가 나타났다. 관청조직으로부터의 탈피가 사업의 원활한 수행에 어떤 효과를 가져 왔으냐 하는 점은 앞의 증언 에서 나타난 바 있다. 그렇다면 행정 기능과 사업 기능의 분리도 바라던 목적을 달성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기대 이상으로 긍정적이다.

한국통신이 발족할 무렵 체신부 주변에는 정보화사회라는 신선한 바람이 일고 있었다. 바람을 일으킨 장본인은 오명 차관이었다. 81년 5월 체신부차관으로 부임한 오명은 세미나 형식의 교육을 통해 C&C로 압축되는 정보화사 회를 제시하며 사상적으로 아직 때가 덜 묻은 체신부 간부들을 일깨우는 작업을 했다. 그 결과 그가 부임한 지 1년이 채 안돼 체신부 간부들은 미래사 회는 정보화사회이며 컴퓨터와 통신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정보화사회에서는체신부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고 자부심을 갖고 주장하곤 했다.

체신부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전기통신기술을 다루기 때문에 과학기술에 대한지식 수준은 높았으나 공채 출신이 적기 때문에 공채 출신이 지배하는 다 른경제부처와 상대할 때는 언제나 이론적으로 밀렸다. 반면에 그들은 전통적 으로 성실하고 장관이나 차관 등 윗사람을 잘 모셨다.

한국통신이 분리돼 나갈때 나이 많고 요령 좋은 간부들은 대부분 그쪽으로넘어간 반면 젊고 실력있는 간부들은 체신부에 남았다. 그러한 그들에게 미래사회에 대한 찬란한 비전을 제시하는 오명 차관은 정보화사회라는 신흥 종교의 교주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권력의 핵심인 청와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점이 그의 위상을 더욱 높여 주었다.

경제기획원이나 상공부 등 다른 경제부처에 눌려 지내기만 하던 체신부 사람들로서는 미래사회를 주도해 나간다는 신념을 갖게 된 것만으로 신나는 일 이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한국통신이라는 거대한 기관을 피감독기관으로 거느리게 된 것은 더욱 신나는 일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젊은 지도자인 오명의 사상에 충실히 따르며 전기통신사업의 분리로 공백상태에 빠진 체신부를 재정비하는 한편, 정책 기능을 확립하는 일에 혼신의 노력을 경주했는데, 그러는 과정에서 정보화사회를 향한 참신한 정책이 하나 둘 빚어지기 시작했다.

그중 정보화사회의 기반구조가 되는 전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화대량 공급정책이 우선적으로 추진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체신부가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능동적으로 움직인 반면, 신설된 한국통신은 체신부의 방향 제시에 따라 비교적 피동적으로 움직였다. 그 결과분리된 지 얼마 안돼 같은 뿌리에서 갈라진 체신부는 정책 부서로서, 한국 통신은 사업 부서로서 역할 분담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정책과 사업이 엄연 히구분되는 체제로 발전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러한 체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체신부의 정책 기능은 한층 강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오명이 차관으로 6년 2개월, 다시 장관 으로 1년 5개월 동안 장기집권을 한 덕분에 정책의 일관성이 확보되었다. 정 보화사회를 지향하고, 정보화 마인드를 확산한다는 체신부의 정책은 5공 내내지속되었을뿐 아니라 6공으로도 이어졌다.

장기집권한 사람은 비단 오명 차관만이 아니었다. 한국통신의 초대 사장 이우재도 7년 2개월 동안 그 자리를 지켰고, 청와대에서 측면지원을 해주던 홍성원 비서관도 8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이들 세 사람의 장기집권이 통신정책의 일관성을 유지시켰을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통신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 왔다.

80년대의 통신 발전을 이해하려면 각 분야 주인공들간의 역학관계를 살펴 볼필요가 있다. 80년대 통신 발전의 주체는 체신부와 한국통신이었지만 청와대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었다. 청와대에서 몇가지 매우 중요한 정책결정을 해주었고, 또 고비고비마다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전대통령의 통신에 대한 깊은 이해도 한몫을 단단히 했다.

그들 세 기관에서 통신 발전의 주역으로 활동했던 사람은 체신부의 오명 차관, 한국통신의 이우재 사장, 청와대의 홍성원 비서관이었다. 그들은 각각 자리가 다른 만큼 개성도 달랐으나 육사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우재가 오명보다 5년, 오명이 홍성원보다 5년 선배였다. 후배 두 사람은전자공학박사로서 오랫동안 육사 교수로 활동한데 비해 이우재는 통신장교 로커 올라가다 국보위를 거쳐 사장이 되었다.

그랬던 만큼 세 사람은 각각 개성이 달랐다. 홍성원은 아이디어가 풍부한 이상주의자였다. 그는 어떤 아이디어를 실천해 옮겨야 할 입장에 있는 것은아니기 때문에 정책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만으로 자기 역할을 다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오명은 기술 관료인데도 업무 추진력과 관리 능력이 뛰어났다. 그는 직원들의 관리는 물론 학계나 언론계, 정계의 인사들과 폭넓은 인간 관계를 형성해 나갔다. 이에 비해 이우재는 충직하고 보수적인 군인이었다.

그는애써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려 하지 않았고 제시된 방향대로 집행하는 일에만 충실했다. 그러한 그들이 육사 선후배 관계 때문인지, 아니면 임명권 자의 훌륭한 포석 때문인지 묘한 팀웍을 이루며 조화를 이루어 나갔다.

그들 세 사람의 관계를 잘 아는 청와대 모 비서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청와대가 정책 방향을 제시해 주고 체신부가 정책을 수립하고 한국통신이 집행을 하는 체제가 이뤄졌는데, 이 팀이 5공 내내 바뀌지 않았어요. 연속성 이 있었던 거죠. 게다가 이 팀이 기막힌 조화를 이루었어요. 이 팀이 서로자리가 바뀌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는데, 아마 상당히 달라졌을 겁니다.

청와대의 홍성원 비서관은 머리가 아주 좋은 사람으로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했어요. 그저 방향만 정해 주면 될 뿐 실천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좋은 아이디어를 여기저기 많이 던져 주었죠. 그리고 뒤에서 뒷바라지를 잘해 주었죠. 체신부의 오명 차관은 버라이어티가 있는 사람으로 수평적으로도 잘했어요. 언론계나 정계, 권력층까지 두루두루 살필 줄 알고 밑의 부하들 관리도 잘했어요. 알기도 많이 알고요. 한 마디로 훌륭한 교향악단 지휘자였죠. 이에비해 한국통신의 이우재 사장은 야전군 사령관이었어요. 남앞에 나서서 얼굴 을 내려고 하는 성격도 아니어서 애써 아이디어를 내려고 하지 않고, 집행만 하는 사람이었죠. 그러한 팀웍이 기막혔기 때문에 1980년대의 통신혁명이 가능했던 겁니다." 이처럼 정보화사회에 대한 이해가 깊은 통신분야의 핵심 인물들의 장기집권은 정책의 일관성으로 나타났고, 그들이 같은 자리에 오래 앉아 한결같이외친 덕분에 통신의 중요성에 대한 일종의 컨센서스가 이루어졌다. 즉, 미래 사회는 정보화사회이며, 그러한 정보화사회에서는 통신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데 대한 컨센서스가 은연중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전화란 단순한 편의시설이 아니라 국가사회 발전을 위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선행투자의 하나라는 점에 대한 인식이 폭넓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묵시적 컨센서스는 통신에 대한 투자 증대로 나타나 제4차 5개년 계획 기간에는 3%에불과하던 국민총투자 중 전기통신에 대한 투자비율이 제5차 5개년계획 기간에는 7.5%로 대폭 높아졌다.

"1980년대 통신사업의 고속성장의 비결로는 우선 정책의 일관성을 들어야합니다. 우리나라 통신사업이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고속 성장의 문턱에서 주저앉았던 이유는 정부의 정책이 잘못되었기 때문인데, 1960년대에 통신에 대한 투자재원을 타 부처로 넘기는 비극이 없었더라면 1970년대 하반기에 이 미전화 적체는 해소됐을 겁니다. 그런데 1980년대에는 미래 정보화사회에 있어서 통신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위로는 대통령으로부터 하게 되었고, 이 분야를 고도로 발전시킨다는 정책이 10년 동안 일관되게 유지되었기 때문에 통신혁명이 가능했던 겁니다." 체신부 초대 통신기획과장 이인학의 주장이었다.

"한국통신이 고속성장의 길로 치닫을 수 있었던 원인 분석을 한다면, 그동안정부에서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해 왔던 점을 들수 있을 겁니다. 오명 차관 이그 자리에 오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책이 흔들리지 않았어요. 그처럼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던 게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죠."한국 통신 초대 사장 이우재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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