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7월 1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전국전화자동화 완성 기념식"이 열렸다. 문자 그대로 전국의 전화가 100% 자동식으로 바뀐 것을 기념하기 위해 열 린이 날의 기념식에는 전두환 대통령이 참석해 "올해에 우리는 GNP 1천억달 러에 1천만회선이라는 또 하나의 신기록을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고 전제한 다음, "정부는 전기통신 분야의 빛나는 성과를 발판으로 하여 정보화시대를대비하는데 있어 핵심적인 과제인 국가전산화사업을 본격 추진할 계획이다" 라고 말했다.
체신부의 행사에 대통령이 참석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1957년 1월 6.
25때소실된 서울중앙우체국 청사의 재건 기념식에 이승만대통령이 참석했고 1970년 6월 금산위성통신지구국 준공식에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했으며, 1985년 1월 보은의 제4위성통신지구국 준공식에 전두환대통령이 참석했다.
그런정도였다.
이날 체신부 오명차관은 전국에서 자동화가 가장 늦게 된 발안전화국에서 기념식을 가진 다음 발안전화국 관내 한 어촌의 어부와 기념통화를 했다.
"전화가 들어가서 편리하시겠습니다." "편리한 것도 편리한 거지만, 이제 생선 값을 제대로 받게 되었습니다."전 화 때문에 생선 값의 제 값을 받는다? 오차관에게 두고두고 남는 말이었다.
그 무렵 강원도 한 산골에서 고랭지 채소를 재배하는 한 새마을 지도자는 전화 덕분에 마을의 소득이 30%나 올랐다고 떠들고 다니기도 했다.
그해 9월 30일에는 "전화 1천만회선 돌파"라는 또 하나의 기념식이 있었다. 전화 1천만회선이란 한 집에 전화 한 대씩을 의미했다. 전국 전화의 자동 화와 1가구 1전화시대의 개막. 그것으로 오랫동안 사회 문제로 남아 있던 전화문제는 일단락된 셈이었다.
그 무렵 아웅산사건에서 남편 김재익을 잃고 미국으로 건너가 있다 돌아온 숙명여대 이순자교수는 귀국한 즉시 전화를 신청했다.
"오전에 놔 드릴까요, 오후에 놔 드릴까요?"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요새는 신청하면 즉시 놔 드립니다." 기가 막힐 일이었다. 삼사년 전까지만 해도 전화 한대를 놓으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했고 또 구비서류는 얼마나 복잡했던가! 세상이 이렇게 달라졌단말인가! 그는 즉시 오명차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관님, 그동안 일을 이렇게 많이 하셨습니까. 정말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이게 제가 한 겁니까. 김수석께서 다 해놓으신 거죠. 그분 때문에 덕을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게 어찌 그사람 덕분이겠어요. 오차관님이 열심히 하신 덕분이죠. 그렇게 대꾸는 했지만 "한 사람이 정열을 바쳐 일을 하면 결과가 이렇게 되는구나! 하는 진한 감동과 함께 새삼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느꼈다.
이처럼 신청 즉시 가설체제가 이루어짐으로써 우리나라 전화문제는 완전히해결되었다. 공사체제로 바뀐지 불과 6년만의 일이었다. 한국통신이 설립되기 전년도인 1981년말의 전화 공급 대수가 3백50만 회선이었는데, 그후 6년 동안에 6백70만회선을 증설했으므로 1년에 1백10만대를 공급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87년에 전화 1천만회선을 돌파함으로써 전화 공급량에 있어 세계 10위권에 진입하게 되었고, 동시에 전자화율을 72%로 끌어올림으로써 전화시설의 현대화도 이룩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80년대초까지만 해도 후진국 수준이던 우리나라의 통신이 불과 몇년 사이에 선진국 수준으로 탈바꿈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전기통신사업이 이처럼 급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전기통신사업의 운영 주체인 한국통신이 경영을 잘했기 때문일까?이 에 대한 대답은 그렇게 긍정적이지 않았다. 한국통신의 간부들은 체신부에서 그대로 자리를 옮긴 사람들이어서 경영 혁신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최고 경영자인 이우재 사장 역시 통신장교 출신일 뿐 전문 경영인과는 거리가멀었다. 외부에서 영입한 간부도 몇 사람 있었지만, 그들은 민정당 등에서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사람이 대부분이어서 새로운 바람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공사체제로 환경이 바뀌었다고 해서 그들 경영진으로 경영 혁신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이우재 사장의 공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비록 뚜렷한 경영철학을 내세우지 않았다 해도 이우재는 나름대로 사장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해냈다. 그의 가장 큰 공로는 한국통신이라는 거대한 조직을 재빨리 안정시켰다는 점이다. 한국통신은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춘 거대한 기업인데다 조직 이나 인원, 재산 등을 체신부로부터 인위적으로 분리시켜 어수선한 분위기에서출발했기 때문에 조직이 안정되려면 장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런데이러한 일반의 예상을 뒤엎고 뜻밖에도 짧은 기간에 조직이 안정되면 서순조로운 출발을 했다.
군인으로서, 경영인으로서 이렇다 할 특징은 없지만 이우재는 성실하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공사 사장이 되면서 그는 여비서나 운전사 등 꼭 필요한 사람 몇몇을 제외하고는 자기 사람을 데려오지 않았다. 또한 사장이 되고 나 자신설 회사에서 흔히 있게 마련인 대폭적 인사이동이나 물갈이를 생각하기 에앞서 신분상의 불안에 떨고있는 사원들을 감싸안으려는 노력부터 했다.
처음1년 동안은 1주일에 절반은 지방에 내려가 직원들과 대화를 나누며 일 체감 조성을 위해 노력했다. 게다가 그는 외부의 압력에 대해 방풍벽 역할도 했는데, 이러한 요소들이 겹쳐 조직이 쉽게 안정될 수 있었다. 그가 방풍벽 역할을 하게 된 것은 그의 의도적인 노력의 결과가 아니었다. 5공시절의 절대권력자인 전대통령과 아주 가까운 사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정치권이나 권력 층으로부터 신설 공사에 대해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조직의 안정을 위해 어떻게 노력했는지 이사장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공사가 되고 나자 직원들은 공무원 신분에서 벗어난데다 잘 알지도 못하는사람이 사장이 되고 보니 대폭적인 인사이동 등 신분상의 불안을 느끼는것같았어요. 사장 입장에서는 엄청난 조직을 운영하려면 조직이 안정되는 게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안정에다 역점을 두고 항상 강조하고 다녔어요. 1주일에 절반은 지방에 내려가서 작업 현장에서 직원들과 대화를 나눴죠. 사실은 모두가 관료 출신이기 때문에 의식개혁 차원에서 물갈이를 하는게 좋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새 바람을 불러 일으키자면 교체가 필요할 것같았어요. 그런데 안정 쪽으로 가는 것이 사업을 추진하는데 더욱 중요하다는 판단에서 생각을 바꿨던거죠. 그러나 새 바람은 일으켜야 하지만, 단시일에 하는 것보다는 장기적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 해서 공채를 하기 시작했어요. 10년, 20년에 걸쳐 교체 를 해야지 하루 아침에 교체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었죠." 그리하여 순풍에 돛을 단듯 유유히 출범하는데도 한국통신의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넘치는 활력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전화국 직원들까지도 관료주의는 그대로 남아 있었고 번문욕례가 심했다. 게다가 책임지기를 싫어하는풍조가 급속히 조성되었다. 한 예로, 체신부에서 공문이 한 건 내려오면, 해당부서에서 서로 맡지 않으려고 핑퐁을 치는 바람에 담당 부서를 찾아 몇 군데를 헤매다 원점으로 돌아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체신부가 능동적인데 비해 한국통신은 피동적이었다. 체신부는 끊임없이새로운 아이디어를 짜내 정책을 개발해 놓으면 한국통신은 마지못해 피동적 으로 움직였다. 같은 체신부 출신인데도 그렇게 차이가 났다. 한국통신이 분리될 때 장래성있고 유능한 사람은 체신부에 남기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그러다 보니 공채 출신을 포함, 실력있는 간부들은 대부분 체신부에 남게 되었다. 특히 공채 출신중에서도 실력과 업무 추진력을 겸비한 이해욱.신윤식.윤동윤 등이 체신부 요직인 우정국장.통신정책국장.기획관리실장 자리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한국통신의 분리로 한산해진 우체국 업무의 활성화와 통신정책 기능의 확립을 위해 헌신한 결과 체신부 주변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게다가 체신부는 그 무렵부터 젊은 공채 사무관들을 대량 영입했기 때문에 참신 한 기풍이 감돌고 있었다.
또한 두 기관의 리더가 극히 대조적이었다. 체신부의 실질적인 리더인 오명차관은 아이디어가 풍부한 이상주의자로서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으며 일을 벌였는데, 이에 비해 보수적이고 성실한 성격의 이우재 사장은 감독 관청의 정책 의지에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자세로 따를 뿐 앞장서 나가 려하지 않았다. 이러한 두 사람의 성격이 간부들에게도 그대로 반영되어 한쪽은 적극적인 반면 다른쪽은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체신부의 정책기능이 매우 활발했던데 비해 한국통신이 너무 피동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체신부에서 정책이 결정되고 한국통신이 집행하는 과정에서, 체신부 정책의 아이디어가 한국통신에서 나와줬으면하는 아쉬움이 컸어요. 그러면 정책도 빨리 만들어지고 집행도 빨리 될 수있었죠. 예를 들어, 지금까지 한국통신이 이룩한 업적 가운데 한국통신이 주도해서 된 게 뭔지 구체적으로 들어보라고 한다면 내놓기 어려울 겁니다."전 자통신연구소의 TDX사업개발단장으로, 나중에는 한국통신진흥(주)와 한국통신기술 주 의 사장으로 한국통신의 흐름을 누구보다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던 량승택의 주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화 혁명이 가능했던 비결은 뭘까?사업 운영 주체가 피동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업이 발전했다면, 그 사업을 이끈 정책이 옳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실이 그랬다. 한국통신을 분리시키고 난 뒤 체신 부는 활발하게 움직이며 전기통신에 관한 정책 기능을 대폭 강화했다. 그리하여 체신부는 방향을 제시했고 한국통신은 그 방향에 따라 집행했다. 공사 화의 제일의 목적은 정책 기능과 사업 기능의 분리였다. 그렇게 본다면 공사 화의 소기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결국 공사체제로 전환했다는 사실 자체가 발전의 비결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그것이 전부일까? 한국통신의 일부 간부층이 소극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라 해도 체신부에서 그대로 넘어간 한국통신의 사원들은 전통적으로 성실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한국통신 사원이라는 신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같은 건물에서 일하는우체국 직원에 비해 50%나 더 받는 월급에 감지덕지했다. 때문에 그들은 힘 든줄 모르고 전화 현대화작업에 동참했다.
그것도 물론 공사화의 효과였다. 그러나 그것이 전체의 대답이 될 수는 없다. 전화혁명의 싹은 이미 공사 설립 이전부터 트고 있었다. 전자교환기의 도입을 하나의 예로 들 수 있다. 전자교환기가 보급되었기 때문에 전화의 대량 공급이 가능했고 통화 품질의 향상이 가능했다.
전화 대량공급계획도 이미 1970년대말에 수립되었다. 연간 100만대의 전화 공급계획이 실천에 옮겨진 것은 한국통신 설립연도인 1982년이었으나, 그러한 대량 공급계획이 세워지고 그럴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은 그보다 3~4 년의 전의 일이었다.
우리나라 전화혁명은 이처럼 한국통신이 설립되기 전부터 그 싹이 트고 있었고 공사체제로의 변혁이 그것을 뒷받침하고 가속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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