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정보통신 비사 소리없는 혁명 (30)

1983년 12월 1일 삼성반도체통신 강진구 사장은 기자 회견을 갖고 삼성반도체통신 64KD램의 생산.조립.검사까지 완전히 자체 개발을 하는데 성공함으로써 미.일에 비해 10년 이상 뒤떨어졌던 한국의 반도체기술 수준을 2~3년으 로좁힐 수 있게 되었다"고 발표했다. 이 소식은 전파를 타고 삽시간에 국내 외로 전파됐다. 국내의 주요 일간지들은 "초대규모 집적회로시대 열어", "기 술한국의 승리" 등의 제목으로 그 사실을 보도했다.

삼성반도체통신이 64KD램의 개발에 성공한 것은 보름쯤 전인 그 해 11월 중순이었다. 그런데 삼성은 그 사실을 공개할 것이냐는 문제를 놓고 한때 망설였다. 그 사실이 밝혀지면 일본의 극심한 경계를 불러 일으켜 앞으로 더높은 단계의 반도체를 개발하는데 장애가 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예상했던 대로 2~3년 전부터 64KD램을 생산하고 있던 미국과 일본의 반도 체생산업체들은 이 소식을 큰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삼성이 64KD램의 개발에 도전하자 "한국의 기술 수준으로는 86년까지 개발한다해도 대단한 성공 이라고 공언할 만큼 한국의 기술 수준을 얕잡아보고 있었던 것인데, 6개 월만에 개발에 성공하자 놀라는 한편, "웨이퍼 몇 매에서 동작하는 칩을 만들었나 보다. 그러나 수익사업으로 연결시키긴 힘들 것이다"라며 평가절하 하려는 경향도 보였다.

삼성이 초대규모집적회로(VLSI)사업에 투자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은1983년 3월이었다. 그러한 결정을 내리기까지 73세의 이병철 회장은 고뇌에 찬 장고를 거듭했다. 결단을 내리기에 앞서 82년 그는 미국과 일본을 방문하여 그곳의 산업계를 둘러보고 수많은 전문가를 만나며 구상을 가다듬었다.

미국방문에서 우리는 지금 전환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일본 방문에서 그들이 경박단소의 첨단기술산업에 매진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 무렵 일본은 반도체.컴퓨터.신소재.광통신.유전공학 등 자원절약적이 고부가가치 높은 첨단기술로의 전환을 도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자원이 부족하여 무역입국의 길밖에 없는 한국이 살길은 첨단기술의 개발밖에 없다. 그 중에서도 특히 "산업의 쌀"이라 일컫는반도체를 개발하는 것이 현재의 산업발전 단계에서의 국가적 과제다"라고 그는판단했다. 그러나 반도체의 개발은 엄청난 설비투자가 소요될 뿐만 아니라기술 혁신의 주기가 매우 짧아 많은 위험이 뒤따른다. 따라서 그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미국과 일본이 독점하고 있는 세계시장에 뒤늦게 뛰어들어 경쟁에 서 이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다. 그런데도 반도체 개발은 누군가가 고난을 무릅쓰고 반드시 성취해야 할 프로젝트였다. 73세의 이병철 회장은 인생의 황혼기이지만 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해 어렵더라도 전력투구를 해야 할 때가 왔다며 반도체 개발의 결의를 다졌다.

그렇다면 삼성은 왜 그 많은 반도체 제품 가운데 하필이면 규모가 크고 경쟁이 치열한 메모리반도체인 64KD램을 선택했을까? 그 점에 대해서는 좀더 설명할 필요가 있다.

1980년대초까지 삼성이 개발한 반도체 제품은 시계나 TV.오디오용 칩이었는데 그 사업은 큰 액수는 아니지만 계속 적자를 내고 있었다. 이에 비해 일본의 반도체 회사들은 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었다. 그 원인을 분석한 결과 삼성이 생산하고 있는 TV나 오디오용 반도체는 종류는 많고 생산량은 적은데 자체 소화력이 큰데다 해외에 합작회사까지 거느리고 있는 일본의 기업들은 종류당 생산량이 월등히 많았다. 때문에 대량 생산으로 승부를 걸 수있는 반도체 제품을 찾은 결과 메모리반도체로 낙착됐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병철 회장과 고민을 같이했던 삼성반도체통신 강진구 사장 의이야기를 들어보자.

"일본과 비교해 보니까 우리는 경제단위의 생산을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경제단위가되려면 1개월에 수백만 내지 1천만개의 칩을 만들어 팔아야 하는데자체 생산용 가전제품으로는 그러한 물량을 소화시킬 방법이 없었어요. 결국세계 시장을 대상으로 대량 생산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었죠. 그 무렵반도체 제품 가운데 대량 생산과 대량 판매가 가능한 것으로는 마이크로프로 세서와 메모리반도체가 있었는데, 마이크로프로세서는 인텔이 특허권을 갖고있기 때문에 우리가 개발할 경우 특허권 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어 우리에게 안맞는 사업이라고 결론을 내렸죠. 이에 비해 메모리반도체는 전세계가 하나의 시장입니다. 그 말은 전세계를 대상으로 경쟁을 해야 된다는 거죠.

결국삼성이 전자산업을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반도체를 개발해야 하고, 반도체사업에서 이익을 남기려면 대량 생산이 가능한 품목을 택해야 하고, 그러다 보니까 세계를 대상으로 싸우지 않을 수 없는 메모리반도체를 택하게됐던 겁니다. 경쟁이 무섭다고 해서 좌절한다면 앞으로 삼성이 뭘 할 수있겠느냐는 생각에서 그렇게 단안을 내렸던 거죠" 그러한 단안을 내린 지 불과 8개월만에 삼성은 64KD램을 개발했다. 그렇다면그처럼 짧은 기간에 세계에서도 미국과 일본만이 가능한 첨단기술을 개발 했던 비결은 무엇일까? 64KD램은 그처럼 개발하기 쉬운 기술이었을까?물론 그 대답은 "천만의 말씀"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외국의 전문가들은 "한국의 기술수준으로는 1986년까지 개발한다 해도 대단한 성공"이라 할 만큼한국의 기술 수준은 낮았고, 또 반도체의 개발은 그만큼 어려운 기술이었다.

그렇다면 그 비결은 뭘까? 단기간에 첨단기술을 개발하는 방법으로 삼성은 기술 도입과 기술자 영입 이라는 두가지 카드를 동시에 사용했다. 기술 도입 상대로는 미국의 모험기 업인 마이크론 테크놀러지(Micron Technology)를 택했고, 기술자를 영입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실리콘밸리에 트라이스타 세미컨덕터(Tristar Semiconducto r)라는 현지법인을 세웠다.

기술자 영입은 스탠포드대학의 이임성 교수를 만나 예상보다 순조롭게 진행되어 이일복.이상준.이종길 등 재미 과학자를 비롯하여 중국인.일본인.미 국인 등 32명의 기술자를 모을 수 있었다. 이일복 등 재미 과학자들은 미국 의이름있는 반도체회사에서 다년간 D램 반도체 개발에 종사한 경험이 있는베테랑 기술자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트라이스타에서는 실제로 반도체를 만들수 있는 기능공도 70여명 모집했다.

이처럼 64KD램 개발작업에 동참할 기술자들은 삼성의 재력으로 쉽게 확보 할수 있었으나 마이크론으로부터의 기술 도입은 순조롭지 않았다. 삼성은 기 술연수차 마이크론으로 기술자 십수명을 파견했으나 상대방이 기술 이전을회피하는 바람에 장님 코끼리 만지기를 계속하다 1개월여만에 철수했다. 이 제남은 길은 자력으로 연구개발하는 수밖에 없었다.

1983년 6월 삼성은 트라이스타에 모인 기술자 중 이상준.이종길 등 핵심 기술자들을 부천의 기존 반도체공장에 투입, 미국에서 받은 칩을 이용해 제품을 직접 개발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부천공장은 첨단 메모리반도체 제품을 생산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인 청정도 유지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데다 300여개에 이르는 제품 공정중에서 핵심 기술인 미세가공기술 공정을 실현할 수 있는 장비가 없어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그런데도 6월에 시작된 조립생산작업은 5개월만인 11월에 양질의 64KD램을 만들어냄으로써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미국에서 64KD램의 개발작업에 참여한 바 있는 재미 과학자들 이 정성을 쏟은 결과였다.

그렇다면 그때까지 우리나라 반도체 개발 기술 수준은 어느 정도였을까?19 47년 미국의 쇼클리(W. B. Shockly)가 트랜지스터를 개발함으로써 시작된반도체산업은 1950년대의 시험기를 거쳐 1959년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에서 직접회로(IC)를 개발한 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성장 궤도에 들어섰다. 반도체 는 라디오나 TV 등 전자제품은 물론 통신장비, 산업용 기기, 군수장비 등으로 사용 범위가 확대됨에 따라 그 수요가 폭발적인 증가 추세를 보였다.

우리나라의 반도체산업은 다른 전자산업이 그렇듯이 값싼 노동력을 겨냥한 미국 기업의 대한 진출로부터 시작되었다. 1965년 미국의 코미(Komy) 그룹이 우리나라 최초의 반도체회사인 고미반도체(주)를 설립한데 이어, 1966년에 시그네틱스(Signetics), 1967년에 페어차일드(Fairchild)와 모토롤러(Motoro la) 등 미국계 반도체회사가 속속 설립되었다.

국내 기업 가운데 최초로 반도체회사를 설립한 것은 금성사였다. 미국의 내셔널 세미컨덕터(National Semiconductor)와 기술 제휴를 한 금성사는 196 9년 반도체 전문회사인 금성전자(주)를 설립하고 라디오 부품인 에폭시 트랜지스터를 생산했는데, 이는 금성사에서 생산한 라디오 부품으로 쓰였다.

그 후 1974년 1월에는 국내 유수의 오퍼상인 KEMCO의 투자로 한국반도체 (주)가 설립되었다. 이 회사는 세계적인 반도체업체인 모토롤러에서 반도체 핵심기술을 연구 개발하여 CMOS기술의 세계적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는 재미 과학자 강기동박사를 영입하여 그의 기술 지도하에 초현대식 웨이퍼 가공공장을 완공하였다. 그리하여 "최첨단의 설비로 최첨단의 제품을 생산하자"는 슬로건 아래 첨단 반도체 제품의 생산을 위한 의욕적인 출발을 시도했으나 공장건설 초기에 대규모의 설비자금을 투입한데다 때마침 몰아닥친 석유파동 으로 인한 세계적인 경기 침체가 겹쳐 심각한 자금난에 부닥치자 1976년 경영권을 삼성에 넘기고 말았다.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삼성은 1978년 3월 상호 를삼성반도체(주)로 바꾸는 한편, 반도체 조립업계의 선두주자로서 노사분규 에휘말려 있던 미국인 기업 페어차일드의 대방동공장까지 인수했다. 그 결과 삼성반도체는 웨이퍼의 조립으로부터 가공생산에 이르기까지 일관생산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반도체산업은 초기단계인 1965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는 풍부한 저임금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한 단순조립 형태였으나 1970년대 후반부터 국내의 대기업이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일관생산체제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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