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정보통신 비사 소리없는 혁명 (19)

83년 6월 체신부는 전기통신연구소에 TDX개발단을, 한국통신에 TDX사업단 을설치하라는 공문을 보냈는데, 전자는 TDX의 연구개발과 생산업체에의 기술 전수 등의 업무를, 후자는 TDX 개발에 관한 순기관리, 연구개발비의 출연, 구매규격 및 공급계획, 생산업체의 생산 유도 등의 업무를 담당하도록 했다.

이에따라 전기통신연구소는 83년 9월부터 TDX개발단을 잠정적인 기구로 설치 운영하다가 이듬해 1월부터 정식 기구로 발족시켰으며, 한국통신은 84년 1월 사장 직속으로 전전자교환기(TDX)사업단을 신설했다. 그런데 신설된 TDX 사업단의 책임자로 뜻밖의 인물인 전 국방과학연구소장 서정욱이 임명되었는 데, 그의 등장은 TDX 개발에 있어 새로운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이처럼 연구소에는 TDX개발단을, 한국통신에는 TDX사업단을 두게 한 것은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전담조직을 구성, 연구개발 책임자에 게전권을 부여하고 연구개발자금을 TDX 프로젝트에만 투입케함으로써 그 프로젝트를 효과적으로 추진케 하는 한편 연구개발 결과를 생산.운용과 직결시키려는 오명 차관의 남모르는 계산이 깔려 있었는데, 그것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두 기관으로부터 상당한 저항을 받았다.

장본인인 오차관의 말을 들어보자.

"연구소에 TDX 프로젝트로 많은 돈을 대주면 그 돈이 연구소 전체의 연구 개발자금으로 흩어져 버려 본연의 사업이 흐지부지될 염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양승택 박사를 단장으로 하는 개발단에 연구자금을 몰아주고 개발단장 이전권을 갖고 그 프로젝트를 수행해 나가도록 하는 뜻에서 TDX사업단을 만들라고 했던 것인데, 처음에는 연구소가 응하지 않았어요. 연구소 내부적으 로마찰이 있었던 거죠.

또 포병용 컴퓨터 개발과정에서 보면, 개념 정립을 하는데는 6개월밖에 안걸렸는데 실제로 군에서 채택하는데는 4~5년이 걸렸어요. 그러니까 연구소에 서만드는 모델은 6개월짜리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이 야전에서 쓸 수 있는 제품으로 품질관리가 되고 실제로 적용단계를 거치고 생산단계를 거치는 과정에서 그만큼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던 겁니다.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연구 소에서 만든 제품만 가지고는 안된다고 판단했던 겁니다. 즉, 개발단에서 만 든제품만으로는 안되고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필요한 제품을 만들어야 하기때문에 한국통신에 TDX사업단을 두어야 한다고 했던 것인데 한국통신에서 움직여줘야죠. 그래서 할 수 없이 문서로 지시해서 억지로 만들게 했던 겁니다. 한국통신 TDX사업단장으로서의 서정욱의 역할은 TDX 개발사업에 대한 총체 적인 관리였다. 그러나 그 관리란 연구소가 개발하고 있는 세부적인 내용을하나하나 따지는 것은 아니었다. 연구소의 개발 진도와 교환기의 용량, 성능 품질 그리고 가격 등을 따져 한국통신의 시설계획과 직접 연결시키는 작업을 하는 것이었다. 또한 연구소에서 개발한 제품이 생산업체에 어떻게 기술전수가 되고 있으며, 생산업체에서 만든 교환기는 어느 정도의 신뢰도를 확보하고 있느냐를 따지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2백40억원이란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는 과제를 전기통신연구소에 맡겨 놓고그 연구가 제대로 되고 있는지 없는지 아무도 평가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혹독하게 표현하자면 연구소가 거짓말을 한다 해도 알 길이 없었습니다.

진도가제대로 나가고 있는지, 돈이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 생산업체에 기술 전수가 되고 있는지, 개발이 끝난 다음 정말로 업체가 생산을 하려고 하는지전혀 파악할 길이 없었어요. 그러한 문제점을 해결하는 게 TDX사업단장의 역할이었죠. 서단장의 이야기였다.

그 당시 한국통신은 연구개발비만 출연할 뿐 TDX 개발에 대해서는 오불관언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체신부에서 명령하니까 연구개발비를 댈 뿐 연구개 발비의 출연자로서, 또한 연구개발품의 실수요자로서 마땅히 행사해야 할 권한은 포기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기술 수준으로 첨단기술 중의 첨단기술인 시분할교환기를 개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세계적 으로 가장 우수하다는 M10CN이나 №.1A 교환기를 들여다놓고도 고장으로 죽을 쑤고 있기 때문에, 국내에서 개발한 교환기를 전화국에 들여다 놓는 것은있을 수 없는 일로만 생각했다. 때문에 설사 개발이 된다 해도 그것은 연구 소용 장난감 교환기에 불과할 뿐 전화국에 설치할 국설용 교환기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생산업체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 겨우 외국의 교환기 부품을 도입하여 조립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 교환기를 개발한다는 것은 너무 벅찬 목표였다.

또한외제 교환기의 조립 생산으로 이제 막 재미를 보기 시작하는 마당에 굳이엄청난 투자를 해가며 교환기 개발사업에 착수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정부의 방침에 거스르는 행동은 할 수 없기 때문에 몇몇 연구원을 전 기통신연구소에 보내 호응하는 척하고 있었다.

"한국통신 입장에서는 개발이 되리라 믿지도 않았거니와 그 당시 연구소의 능력이나 기업의 능력으로 보아 기대할 수도 없었어요. 그들을 나무랄 수는없습니다. 또 기업들도 정부에서 하는 일이니까 한 다리를 걸쳐 놓자는 것일뿐 반드시 개발하겠다는 의지는 없었어요. 그래서 일부에서는 적당히 개발해 서 농어촌에 일부 사용하는 것으로 명분을 세워주고, 나머지는 우물우물 도입해서 외제를 쓰자는 생각을 했죠." 한국통신과 기업의 이런 생각을 깨뜨린 장본인이 바로 서정욱 단장이었다.

그는 TDX 개발의 전과정에 대해 철저한 순기관리를 함으로써 그들의 고루 한생각을 깨뜨렸다. 그는 연구소와 생산업체를 연결시키고, 다시 생산업체와 실수요자인 한국통신을 연결시킴으로써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교환기가 생산 과정을 거쳐 전화국에 설치되도록 하는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서단장은 교환기 전문가가 아니었다. 그는 군사용 통신기기 개발 전문가였다. 69년 미국 텍사스 A&M대학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얻어 귀국한 그는 국방 과학연구소 창설 멤버로서 연구소 설립작업에 참여한 후 13년 동안 근무하면 서군통신기기 현대화작업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현재 우리나라 군대가 사용하고 있는 무전기는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고 할 만큼 개발 실적이 다양했다. 특히 72년에는 KPRC 6이라는 한국 최초의 휴대형 무전기를 개발했는데, 그무전기를 통해 박대통령과 기념통화를 한 것이 인연이 되어 국방과학연구 소내에 전자통신 분야의 연구부서를 만들 수 있었고, 그 분야의 책임자로 활동하다 결국은 국방과학연구소장까지 승진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그는 국산무기개발에 있어서 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그러한 개발품의 품질관리 면에서남다른 경력을 쌓았는데,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TDX사업단장으로 발탁되었던 것이다.

TDX사업단장 자리에 앉은 서정욱은 적극적이고 직선적인 개성을 십분 발휘 하여 본때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일차적인 공격 목표는 전기통신연구소연구원들이었다. 그의 눈에 비친 연구원들의 모습은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에 불과했다.

"연구원 개개인은 천진난만하고 순수할지 모르나 전체 분위기가 기술을 좋아하는 아마추어 동호인들 모임에 불과했어요. 운동에도 아마추어와 프로가 있잖습니까. 조기축구도 하나의 스포츠입니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은 태릉선수촌에 들어가서 금메달을 따는 프로페셔널한 연구원이지 아마추어 연구 원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 큰 차이가 있었던 겁니다. 모든 국민이 쓰는 교환기이고 교환기가 마비되면 나라가 마비되는데, 그것을 어떻게 아마추어에 게맡깁니까. 적어도 전자교환기를 만드는 연구소는 프로의 모임이어야죠."아 마추어를 프로로 만들기 위해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니며 연구개발 과정에 시시콜콜 관여하는 한편 연구원들을 채찍질했다. TDX교환기를 시험운용 중인 전화국 시설에 낙뢰 등으로 고장이 생길 경우 원근을 가리지 않고현장으로 달려가 살피는 한편, 한 밤중에도 잠자고 있는 연구소의 연구원들 을 깨워 현장으로 불러냈다. 연구소 소장은 잠자코 있는데 제삼자인 TDX사업 단장이 출장비도 주지 않고 불러내 마구 부려먹었다. 그러는 한편 그들과함 께 밤을 새워가며 낙뢰가 떨어진 이유가 무엇인지를 캐내는 자세를 보임으로써 연구원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자신의 직원들에게도 쉽사리할수 없는 일을 남의 직원을 상대로 당연하다는 듯 해냈던 것이다.

그는 밤잠을 자지 않고 현장을 쫓아다니며 연구원들을 독려했기 때문에 독종 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지만, 그 별명만큼 미움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우선 그는 연구원들과 어울려 밤을 새워가며 연구작업에 몰두할 줄 알았고 또 대외적으로는 연구소를 칭찬할 줄 알았다. 또한 연구개발이란 그처럼 체크하고 독려하는 사람이 없으면 예정된 기한내에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연구원들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연구개발이라는 게 언제나 목표보다 더 빨리 끝나는 예가 없습니다. 연구 개발 프로젝트를 주는 쪽에서 무엇을 개발해 달라는 정확한 청사진을 그려서 요구하면 약속된 기간 안에 끝낼 수 있지만 그쪽에서 뭘 요구하는지 모르면서 일을 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개발해 나가는 과정에 자꾸 새로운 요구사항이 들어오는데, 좋은 기능이니까 수용을 안할 수도없습니다. 그처럼 새로운 요구사항을 수용하다 보면, 자꾸 늦어질 수밖에 없죠. 비용도 더 많이 들고요. 그처럼 늦어지는 것은 뻔한 거니까 평상시에 정상으로 나가는 것도 계속 잔소리를 하며 채찍질을 하다 보면 큰 차질은 안나는 것 아니냐 하는 생각에서 그런 작전을 쓰는 것 같더군요."TDX 개발 실무 책임자였던 박항구의 이야기였다.

서정욱 단장은 산업체에 대해서는 또다른 작전을 썼다. "연구개발과 생산 이품질보증과 함께 뒹구는 체제가 되어야 연구개발이 제대로 성공한다"는 확신을 가졌던 그는 이해관계가 다른 4개의 기업이 공동개발에 소극적인 태도를보이자 평가제도를 도입해 그들을 경쟁시켰다. 즉, 공동개발을 하는 과정에서 기업체가 연구소에 얼마나 협조적이냐, 기업이 맡은 부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느냐 하는 계량지표에 의한 평가를 한 다음 그 점수와 교환기의 구매물량을 연계시키는 방법으로 기업들을 꼼짝없이 옭아맸다. 그 결과 어떤 해는 1등과 4등 사이의 구매물량에 1백억원의 차이가 나기도 했다. 기업들의 자세가 적극적으로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연구개발과 생산을 연결한 다음의 과제는 생산과 수요를 연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연구소와의 싸움도 생산업체와의 싸움도 어려웠지만 그보다 어려운것은 집안과의 싸움이었다. 국산 전자교환기 개발에 있어서의 문제점은 TDX 1의 시제품이 나올 무렵에는 그것이 상당한 수준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실수요자인 한국통신에서 그것을 작품으로 인정하지 않는 데 있었다. 국산품 은 믿을 수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 그 두터운 인식의 장벽을 깨뜨리는 일이 지극히 어려웠다.

"물론 기술과의 싸움은 무척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하나 풀어가면 왜 안되겠습니까. 그런데 더 어려웠던 것은 의식 장벽이었죠. "해볼 테면해봐라. 되면 내 손가락에 장을 지지겠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았거든요. 그러나 그들에게 저는 오히려 고맙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부정적으 로생각했기 때문에 저는 더 용기를 냈던 겁니다. "당신네들은 그런 생각을 할수밖에 없다. 받은 교육, 성장한 과정이 그러니 어쩔 수 없지 않겠는가"하 는생각에서 그들을 설득하고 협조를 구하니까 상당히 많은 분들이 나중에는자기 일처럼 도와 주더군요." 서정욱 단장의 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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