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년 1월 청와대 경제제2수석비서관 오원철이 국방과학연구소 부소장 이만영 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현재 많은 기업들이 중동으로 진출하고 있고 수출도 금년에는 1백억달러를 넘어서게 될거고 해서 우리나라도 이제 중진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는데 가장문제가 되는 게 통신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통신은 교통의 대체효과가 높고기업이나 행정의 업무효율을 높이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전화적체 때문에 아우성이니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정부에서는 전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자식 교환기를 도입하기로 결정하고 그 교환기를 생산할 공영회사를 산업은행의 전액출자로 세우기로 했는데, 이박사께서 그 회사사장 자리를 맡아 주셔야겠습니다. 또 하나는 반도체와 컴퓨터 등의 전자 공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구미공단에다 전자기술연구소를 설립하기로 했는데, 그 연구소를 맡아주셔도 좋습니다.
이 두가지 사업은 대통령각하께서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는 사업이고, 이박 사께 특별히 부탁을 드리라고 하신 사항이니만큼, 이박사께서 두자리중 하나를 선택해 주시되 전화문제가 보다 시급한 과제이니만큼 전화교환기 생산회 사를 맡아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대덕연구단지에서 국방과학연구소의 건물을 짓느라 여념이 없던 이만영부소 장에게 이 제의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전자교환기의 생산회사나 전자기 술연구소의 설립에 대해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양자택일이 불가피하다면 자신의 경력이나 취향으로 보아 생산회사보다 연구소쪽이 더 바람직 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그러한 생각을 상대방에게 제대로 전달하기 전에생산회사사장으로 발령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만영이 77년 2월에 설립된 한국전자통신주식회사 KTC 의 사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만영은 누구이며 어떤 인연으로 KTC의 사장이 되었을까?서울공대를 거쳐 미국 콜로라도대학에서 공학박사학위를 얻은 이만영은 버지니아주립대학에서 교편을 잡고있는 재미과학자였다. 72년 그는 풀브라이트장학금에의한 교환교수로 고국으로 건너와 서강대에서 1년 동안 강의를 했다. 교환교수로서의 1년을 마감하는 마지막 강의가 끝나던 날 뜻밖에도 제자인박근혜의 초청으로 청와대를 방문하게 되었다. 박근혜가 누구이며 제자에 그러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던 그는 그렇게 해서 박근혜와 박대통령을 알게되었고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는 제자를 통해 박대통령에게 이따금 소식을 전하곤 했다. 그러다가 75년 박대통령의 부름으로 귀국해 국방과학연구소 부 소장으로 임명되었고 다시 1년 후에는 KTC사장으로 변신했다. 이렇게 해서 술도 담배도 할 줄 모르고 사교할 줄도 모르는 과학자가 전자교환기라는 첨단기술제품을 생산하는 국영기업체의 사장이 되었던 것이다.
사장임명에 이어 77년 2월15일에는 한국산업은행이 전액 출자한 자본금 1천 만원으로 한국전자통신주식회사(KTC)가 설립되어 본사는 서울에, 공장은 구미전자공단에 터를 잡았다. 공장은 연간 66만회선의 교환기를 생산할 수 있는 대규모의 것으로서 그 부지가 5만8천평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공장에서 실제로 하는 일은 교환기 본체의 조립이었다.
그밖에 교환기전용 컴퓨터의 조립과 부품인 커넥터의 생산도 맡았다. 교환기 를 조립하는데 필요한 수많은 부품은 처음에는 기술 제공회사에서 들여오되, 국내에서 공급이 가능한 부품은 국내 생산업체에서 납품을 받도록 했다.
회사가 설립되고 공장 부지가 확보됐지만 사장으로서는 당장 할일이 없었다.
공장의건설, 직원의 채용 및 교육훈련, 연도별 생산계획 등 앞으로의 일정 이 빽빽이 짜여 있어 마음은 바쁘지만, 도입기종이 결정되지 않아 갈 길이막 혀 버렸다. 따라서 책임감이 강한 이만영 사장은 경제장관간담회로 달려가조 속한 기종의 결정을 촉구하는 한편 후보로 남아 있는 후지쯔와 ITT 두 회사 에 공장설계도를 협조해 달라는 문서를 보내기도 했다.
"66만회선 생산 규모의 공장 부지를 마련하고 건물을 짓고 기계를 발주해 넣고 1백10명의 기술자를 모집해 해외훈련을 시켜야 하는데 경제장관간담회에 서 미적미적 기종 선정을 미루는 거예요. 그러니까 몸이 단 것은 사장일 수밖에요. 그래서 경쟁자로 남아 있는 후지쯔와 ITT 두 회사에 오더를 발송했어요. 아직 선정은 안됐지만 한가지 질문을 하겠다. 연간 66만회선의 생산을 목표로 5만8천평의 부지에 8천~9천평의 원피스 공장을 짓는데, 거기에 필요 한 기계배치도, 공조시설, 냉난방시설, 그리고 기술자와 공원의 숫자, 훈련 계획 등 일체를 알려 달라고 했죠. 그랬더니 후지쯔는 10페이지도 채 안되는타자지에 간단히 정리해 보냈는데, ITT는 벨지움 안트워프에 있는 공장 설계 도와 가격, 기술자 훈련계획 등 일체를 보내 왔어요. 그 무렵 ITT제품은 세계 각국에 20만 회선을 판매한 경험이 있는데, 후지쯔 제품은 외국에 수출한 경험이 없었어요.
그때 어떤 기종을 선정하느냐는 문제가 대두됐는데, 그 자료를 경제장관간담 회에 내놓고, 기종 선정은 정부에서 하는 일이니까 후지쯔로 하겠다면 할 수없는 일이지만 실제로 조립.생산하는 사람은 사장인데 그렇게 될 경우 책임지기가 어렵다. 따라서 해외 시설 경험도 있고 훈련도 다 시켜 주겠다는 ITT 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ITT로 낙착되었던 겁니다."그후 77년 9월에 도입 기종이 ITT의 M10CN으로 결정되었고, 그해 12월에는 "M10CN 생산을 위한 기술도입 총괄계약"이 체결되었다. 이 계약은 한국측에서는 기종 선정을 담당한 TDTF와 교환기 생산을 담당할 KTC의 대표가, ITT측에서는 실제로 교환 기를 생산하는 자회사인 BTM과 교환기 자재를 납품하는 계열회사 ITTI의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이루어졌는데, ITTI는 전자교환기 조립용 자재를 공급하되 그 책임은 BTM에서 지기로 했다.
한편 KTC를 설립하면서 상고부는 전자교환기의 국내 생산을 목표로 하여 부품을 국내 업체가 공급하도록 하는 계획을 세웠다.
"전자교환기 부품의 공급 안정 및 표준화를 기한다"는 원칙 아래 짜여진 이 계획에 따라 상공부는 77년 8월 전자교환기용 부품 생산 공급업체로 금성통신.동양정밀.대한통신.삼성GTE등 4개 업체를 지정했다. 전자교환기 국제입찰 에서 탈락한 이들 4개 업체에 주는 위로용 선물이었던 것이다.
KTC는 78년 3월에 구미공장 건설에 착공, 1년만인 79년 3월에 완공하여 그때부터 BTM에서 들여온 부품을 조립 생산한 교환기를 체신부에 납품했다. 그 제품은 그해 12월 맨처음 서울 영동전화국과 당산전화국에 각각 1만회선씩설치되었는데 그것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선보인 전자교환기였다. 그러나 개통 직후에는 소통에 많은 문제점이 대두되어 실제로 개통식을 가진 것은 5개월 후인 이듬해 4월22일 제25회 "체신의 날"이었다.
이로써 우리나라도 전자교환시대를 개막하게 되어 전화 대량공급의 길을 열었는데 이러한 전자교환시대의 개막은 우리나라 전자산업 발달사에 있어서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을 계기로 우리나라 전자산업이 가전제품 일변도에서 탈피하여 산업전자시대로 방향전환을 하기 시작했다. 컴퓨터와 반도체가 중요한 구성요소가 되는 전자교환기는 급증하는 통신수요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교환방식일 뿐 아니라 컴퓨터와 반도체 등 전자산업에 미치는 파급효과도 컸다.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으로 전자교환기를 생산하게 된 KTC는 국영기업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민간기업에 비해 몇가지 유리한 점이 있었다. 우선 여유있는 생산시설을 갖출 수 있었다. 연간 66만회선의 교환기를 생산하도록 계획된 KTC의 구미공장은 5만8천평의 대지에 8천8백평의 단일 건물로 출발했는데 대지에 여유가 있어 얼마든지 생산시설을 늘릴 수 있었다. 출발 당시부터 엄청난 규모의 건물을 짓는 것은 민간기업으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첨단 전자제품의 생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적정한 온도와 습도 의 유지인데, 그 필요성을 깊이 인식한 이사장은 그의 성격대로 원리원칙에 따라 꼼꼼히 따져가며 튼튼한 건물을 지었다.
충분한 전문인력을 양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 또 하나의 자랑거리였다. 신설 회사인 KTC입장에서는 가장 큰 애로가 전문인력의 부족이었다. 그 당시는 전자교환기 생산에 관한 한 전문인력이 전무한 상태였다. 따라서 기술제공선인 BTM에서 기술자를 불러다 현장지도를 시키거나 벨기에에 소재한 BTM의 생산 공장으로 보내 기술전수를 받도록 해야 하는데 이사장은 2년 동안에 1백10여 명의 인원을 BTM으로 보내 기술습득을 하게 했다. 이러한 인력은 뒷날 사회 각 분야로 진출하여 우리나라 전자산업 발전에 있어 주춧돌과 같은 역할을 했다. 전문인력을 대량으로 양성할 수 있었다는 게 가장 중요한 업적이라 하겠죠.
그때양성했던 사람들이 현재는 우리나라 통신계의 주역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산업계는 물론 연구소, 학계에까지 널리 퍼져 있죠. 그래서비 전문가가 사장을 맡았다고 욕을 먹긴 했지만 전자산업 발전의 씨는 뿌려 놓았던 겁니다." 이만영 사장의 주장이었다.
M10CN 교환기 설치작업에 실무자로 참여했던 김창곤은 이렇게 덧붙였다.
"무엇보다도 충분한 인력을 확보할 수 있었어요. 게다가 1백명 이상을 BTM에 보내 교육을 시켰는데, 민간기업이면 잘해야 20~30명을 보냈을 겁니다. 그처럼 인력에 대해 아낌없는 투자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공영기업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겁니다. 시설 투자도 당시로서는 무모하리 만큼 크게 했는데, 지금생각해 보면, 그때 그렇게 투자했던 것이 현재 연간 2백만 회선을 문제없이 공급할 수 있는 바탕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반면에 국영기업이 갖게 되는 단점도 그대로 노출되었다. 가장 중요한 문제 점으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경영 문제였다. 이만영 사장을 비롯한 경영층은 회사를 운영한 경험이 없는 순수한 기술자들로 구성돼 있었다. 특히 이사장 은 사교를 모르는 순수한 과학자였다. 따라서 기존의 교환기 생산업체와 끈끈한 관계를 맺어온 체신부 관료들을 만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다고 이사장을 대신해 영업활동을 해줄 마땅한 간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KTC의 유일한 고객으로 전자교환기 수요처인 체신부와의 관계가 원만하게 진행될 수 없었고, 양자간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이사장은 박근혜를 통해 박대통령에게 직소했기 때문에 양자간의 관계는 갈수록 멀어졌다.
이러한 관계 악화는 결국 전자교환기 제2기종의 도입을 서두르고 KTC의 민영 화를 서두르는 촉매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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