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정보통신 비사 소리없는 혁명 (8)

전화 적체와 통화 품질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것으로 믿었던 전자교환기 도입이 정부 방침으로 결정된 것은 76년 2월이었다. 그때 남덕우 부총리가 주재하는 경제장관간담회는 최첨단 교환기인 시분할 전자교환기를 국내에서 개발하기로 전제한 다음, 우선 과도기에 채택할 교환기로 당시에 외국에서 보급되고 있는 전자교환기중 하나를 선정하기로 합의하고, 구체적인 실무작업 은 과학기술연구소(KIST)에 맡기기로 결정했다. 그 간담회에는 박원근 체신 부장관이 참석하긴 했지만, 전자교환기 도입 방침은 체신부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남부총리를 비롯한 경제기획원 간부들에 의해 결정됐고, 전자교환기 도입의 타당성 검토도 주무부처인 체신부가 아닌, 과학기술처 산하 연구소인K IST에 의뢰키로 했다.

한편 전자교환기의 도입방침이 결정되던 날,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장 김재 익이 원자력연구소 에너지계통연구실장 경상현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동안 우리가 얘기했던 전자교환기건이 오늘 경제장관간담회에서 통과돼서 이제 정식으로 타당성 검토를 하게 됐습니다. 그동안 경박사께서 잘 도와주신 덕분에 일이 잘된 것 같습니다." "그것 참 잘됐습니다. 내 생각에도 정식으로 스터디해야 할 문제인 것 같은데 정책결정을 잘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전자교환기 도입 타당성 검토를 KIST에다 맡기기로 했는데 아무래도 경박사께서 그 일을 맡아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나는 원자력연구소에 근무하고 있고 그 프로젝트는 KIST에다 맡기신다는 것인데, 그렇게 되겠습니까?" "그 프로젝트는 3~4개월이면 되는 것인데 경박사께서 도저히 못맡을 이유라 도 있습니까?" "꼭 해야 할 일이라면 못할 이유는 없지만 소속이 다르기때문에 하는 얘기죠. 알겠습니다.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바로 그 날 윤용구 원 자력연구소장이 경상현실장을 불렀다.

"정부에서 급한 과제가 생겨 경박사를 필요로 한다는데, 3~4개월 정도면 된다니까 KIST로 파견발령을 낼 테니 수고를 좀 해주세요."윤소장의 지시에 따라 경상현은 그 날로 KIST의 한상준소장을 찾아갔다. 한소장은 그 프로젝트 의 내용과 그것이 결정된 배경을 설명한 다음 KIST에서 필요한 사람을 차출 하여 팀을 구성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프로젝트는 경제장관간담회가 아닌, 경제기획원과 체신부에서 각각 다른 문서로 의뢰해 왔는데, 기한은 6월말까지였고 그 연구보고의 결과에 따라 전자교환기의 도입 여부와 기종을 결정해 4차5개년계획에 반영한다는 것이었다.

6월말까지는 4개월이 채 남지 않은 짧은 기간이었다. 경상현은 KIST내에서 통신과 컴퓨터.전자분야의 전문가로 소문난 사람들과 신진 엘리트 30여명으 로 태스크포스를 구성한 다음 그가 팀장이 되어 전자교환기 도입의 타당성 검토작업에 착수했다. 그 팀에 합류한 사람들은 성기수.안병성.김종연박사 등 컴퓨터나 통신분야의 중견 엘리트들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기술검토는 안병성 경제적 검토는 유성재, 그리고 총괄작업은 경상현이 맡았다.

당시 39세의 젊은 나이인 경상현은 수재들이 그렇듯이 일류학교를 거쳐 해외 에서 학위를 딴 다음 외국 연구소에서 연구원 생활을 해온 엘리트였다. 58년 서울대 공대 재학중에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로드아일랜드대학 공대를 졸업 한 다음 미국에서도 명문으로 손꼽히는 MIT공대에서 공학박사학위를 얻었다.

전공분야는원자력공학이었다. 그후 미국 아곤국립연구소에 입사해 1년을보 내고 나서 벨전화연구소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니까 벨연구소에서 처음으로통신과 인연을 맺었는데 그곳에서 9년동안 눌러앉아 통신망계획에 관한 일을했다. 즉 그 당시 AT&T에서 개발하여 미국내에서 보급하고 있는 전자교환기 와 기계식 교환기의 경제성 등을 비교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그후 75년 재외 과학자 유치 케이스로 귀국하여 원자력연구소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한 그가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관인 김재익을 처음 만난 것은 그해 가을 과학기술처가 주최한 회의석상이었다. 그때 과학기술처에서는 4차 5개년계획 에 관한 기본구상을 하기 위해 정보산업분야의 전문가 몇몇을 초청해 회의를 가졌는데 그와 함께 김재익이 초청됐던 것이다.

그 무렵 김재익은 전자교환기의 도입문제를 놓고 남몰래 고심하고 있었다.

전화적체문제를 해결하자는 뜻만은 아니었다. 우리나라와 같이 국토가 좁고 부존자원이 부족한 나라는 서비스산업이 제격이며, 그중에서도 금융유통산업 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싱가포르가 아시아의 금융 중심지가 되고 있듯이 서울이 아시아의 금융중심지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통신이 뒷받침을 해주어야 하며, 통신이 제대로 발전하려면 최첨단기술인 전자교환방식을 채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앞으로 전개될 정 보화사회에 대해 희미하게나마 느끼고 있기 때문에 통신이 더욱 중요하다고생각했다. 게다가 전자교환기 문제는 전자산업 육성과 직결되기 때문에 더욱 그의 관심을 끌었다. 따라서 통신 하나만큼은 아시아의 어느 나라보다 발전 시켜야 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자 지론이었다. 때문에 경제학도인 그는 공 학도에 못지않은 정열로 전자교환기에 관한 전문서적을 탐독하며 난해한 기술 문제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과학기술처 회의에서 처음 만난 날 김재익은 경상현에게 다가와 자기 자신을소개한 다음 대뜸 물었다.

"벨연구소에 통신망계획 분야를 다루셨다니까 말씀인데, 혹시 전자교환기와 기계식교환기의 경제성 비교를 한다든가 어느 경우에는 전자교환기가 더 유리하고 어느 경우에는 기계식교환기가 더 유리하다는 것을 스터디해 본 적이있습니까? 그게 바로 제가 벨연구소에서 다뤘던 과제들입니다."그러자 김재익은 반색 을 하며 차나 한 잔 하자며 경상현을 끌고 경제기획원의 자기 방으로 갔다.

그의방에 마주앉아 차를 나눈 다음, 기왕 왔으니 남덕우 부총리에게 인사나 하자며 다시 부총리실로 끌고 갔다.

"대만이 최근에 전자교환기를 채택하기로 결정했다는데, 그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경상현에 대해 소개를 받은 남부총리는 전자교환기에 관한 이야기부터 꺼냈다. 그러나 경상현은 대만 사정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그 당시 세계의 전자교환기 시장은 AT&T가 완전히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었는데, 미국내 시장 이 워낙 크기 때문에 외국 시장에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또한 벨연구소는그들의 통신기술이 앞장서 끌고 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외국의 기술 발전 동향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벨연구소에 파묻혀 있다 온 경상현으로서는 외국의 전자교환기 개발 동향이나 도입 현황에 대해 알 턱이 없었다.

"대만에서 어떤 이유로 어떤 종류의 전자교환기를 채택하는지 모르지만, 대만이든 어떤 나라든 이 시점에서 전자교환기를 채택하는 것이 더 경제성이 있고 장래성이 있다면 전자교환기를 사용하겠다고 결정하는 것은 당연한 것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남부총리는 미국에서는 전자교환기가 얼마나 보급되고 있으며, 어떻게 이용되고 있느냐며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 후 김재익은 1주일에 한두번씩 경상현에게 전화를 걸어와 혹은 그의 방에서 혹은 설렁탕집에서 마주앉아 전자교환기에 대해 거의 기술자가 물어야할 내용을 묻곧 했다.

그때 그가 관심을 보인 문제는 전자교환기 도입에 관한 정책 결정을 하려면 사전에 충분한 검토가 필요할 텐데 그러한 사전 검토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그러한 검토를 한 결과로 나와야 할 주요 항목들은 어떠어떠한 것들인데 그러한 항목들로 자신있는 답을 얻으려면 어떻게해야 되겠느냐는 등 구체 적이고 전문적인 것이었다. 그려면서 그는 상대방의의견을 물었고, 때로는서면으로 정리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처럼 김재익은 전문 분야 사람들과의 대화를 즐겼다. 특히 그가 관심을 갖는 과학기술 분야의 인사들을 만나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 분야에 관한 대화를 나눴고,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방 의견을 자신의 의견으로 소화한 다음 정책 형성에 반영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 과 교유하게 되었고 곧잘 그들을 집으로 초대하기도 했다. 따라서 그의 부인은 굳이 그의 설명을 듣지 않더라도 그가 요즘 어떤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경제기획원에서 경제장관간담회라는 비공식 기구를 동원해 전자교환기의 도입을 결정할 때까지 체신부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전자교환기도입에 관한 한 체신부는 경제기획원이나 상공부와 입장이 달랐다. 체신부 입장에서는 전화 적체 해결이 중요한 과제일 뿐 전자공업의 육성까지 신경쓸 처지는 아니었다. 그때까지 전자교환기는 일부 선진국에서 보급되고 있는 새로운 기술로서 우리나라와 같은 후진국에서는 모방하기도 어려운 고급 기술 이었다. 때문에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체신부 기술자들이 호감을갖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었다.

"기술직들은 대부분 전자교환기 도입을 반대했어요. 전혀 다른 기술이기 때문이었죠. 기계식교환기 기술자들은 대부분 숙련공인데, 전자교환기는 전자 적 특성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기술이니까 숙련공이 필요 없었거든요. 그러니까 자기 직장을 잃을까봐 겁을 냈던 거죠. 실제로 전자교환기가 개통될 때는 교환기 전문가보다 전송 분야에 있던 사람이 더 많이 투입됐어요. 그들이더 이해가 빠르니까요." 전 체신부 계획국장 이응효의 이야기였다.

게다가 초기의 시설투자비가 기존의 기계식전화기에 비해 두배 가까이 들었다. 따라서 투자재원의 부족에 허덕이고 있는 체신부가 소요 물량을 안정적 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기존의 기계식교환기를 버리고 투자재원이 두배로 소요되면서도 기술 도입 전망이 극히 불투명한 전자교환기를 채택하는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통신방식을 선정함에 있어서 몇가지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어요. 첫째는 그 나라의 생산 기술이 어느 수준에 와 있느냐, 둘째는 교육 수준이 어느 수준 에 와 있느냐, 셋째는 운용 기술이 어느 수준에 와 있느냐, 그리고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이 어느 정도 되느냐 하는 점이 중요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신의 방식이 최선의 방식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70년대 초에 체신부 전무국장으로서 전자교환기의 도입 문제를 검토한 결과시기상조라는 결론을 내린 바 있는 정규석은 당시를 그렇게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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