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정보통신 비사 소리없는 혁명 (5)

공사 설립작업에 있어서 가장 힘든 일은 7만명에 가까운 체신부직원을 공사 로 넘어갈 사람과 체신부에 남을 사람 둘로 가르는 것이었다.

그당시 6만8천여명이던 체신부직원은 본부나 체신청에 근무하는 일부 직원을 제외하면 크게 우체국직원과 전화국직원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그들은 어느 쪽의 직원이든 공무원신분이었다. 그런데 전화국직원에서 공사 사원으로 바뀐다는 것은 공무원에서 국영기업체 사원으로 신분이 바뀌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공무원신분을 선호하여 체신부직원이 된 사람은 공사사원이 되는 것을 달갑게 생각할 수 없었다. 반면에 공사사원이 되면 월급이 최소한 50%이 상 오를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에 공사쪽을 선호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인원 분리작업을 앞두고 나타난 현상은 극히 편향적인 것이었다. 간부들은 대부분 체신부에 남는 것을 희망했고, 하급직들은 공사로 가는 것을희망했다. 인원 분리를 위한 인사원칙을 정하기 앞서 최광수 장관은 부이사 관 이상인 체신부 간부 30여명을 모아놓고 양자택일을 하도록 했는데, 두명 이 공사행을 희망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체신부에 남기를 희망했다.

"체신청장 회의를 한 다음 본부 국장급과 체신청장 등 간부들에게 백지에다 희망하는 쪽이 어느 쪽인지 써내라고 했어요. 그런데 30여명 되는 간부들 가운데 두 사람 빼고는 다 체신부에 남겠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한사람 한사람 만나서 설득을 하면 "가겠습니다"하고 수긍하곤 했어요. 차관도 같이 설득했죠. 그렇게 해서 본부 간부들은 큰 불평없이 조정이 됐어요."최광수 장관의 회고였다. 신분에 대한 불안이 가장 큰 이유였다. 공사 사원의 경우, 공무원과는 달리 철저한 신분 보장이 될 수 없을 것이라는 게일반적인 여론이었다. 게다가 당시는 제5공화국이 갓 출범한 시기로서 국내 정세가 매우 불안했다. 따라서 공사가 발족할 때 어떤 경영층이 형성될 것이며, 그러한 경영층이 어떤 이념 을 가지고 공사를 이끌어 갈 것이냐에 대해 아무도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없었다. 특히 공사체제로의 전환를 계기로 보수적인 체신부 풍토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기 위해 세대교체론이 대두될 것이라는 예측이 강해 신분에 대한불안감 이 팽배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공사체제로 바뀔 경우 월급이 최소한 50%는 오를 것이며, 조직 이 신설되면 새로운 기구가 많이 늘어 승진기회가 많아질 것을 예상해 공사 쪽을 선호하는 마음도 있었다. 특히 하급직들은 그러한 경향을 보였다. 그런가 하면 사무관급 중간 간부들은 갈림길에 서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쪽으로 갈 수도 있고, 조쪽으로 갈 수도 있는 본부의 모사무관이 말하기를 엊저녁에 가족회의를 했는데 가는 방향으로 결정했다고 하더니 이튿날 아침에는 못가겠다고 하더군요." 당시 체신부 총무과장 신영철의 이야기였다.

7만명의 체신공무원 중에서 절반이 넘어가고 절반이 남는, 따라서 7만명 모두가 해당되는 정부수립 이후 최대 인사이동을 앞두고 합리적인 인원분리원칙을 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부에서는 그 구체적인 방안으로 체신공무원중 각 직급별로 선발된 대표와 외부의 전문가를 모아 공청회를 개최 하여 합리적인 방안을 찾자고 했고 또 본인의 희망에 따라 결정하자고 했다.

그러나공청회를 개최해 어떤 원칙을 정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고, 본인의 희망을 들어 결정하기에는 그 결과가 너무 편파적이었다.

공사 설립을 몇개월 앞두고 최광수 장관은 인원 분리를 위한 몇가지 원칙을 정한 다음 일체의 인사를 동결시켰다. 최장관이 정한 인사원칙 중 핵심이 되는 것은 현재의 근무 부서를 기준으로 하여 전화국 등 전화업무 관련 부서에 근무하는 사람은 공사로 넘기고, 우체국 등 우편업무 관련 부서에 근무하는 사람은 체신부에 남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구분이 애매한 본부나체신청에 근무하는 사람은 개개인의 희망을 듣고 근무경력을 참작해 결정하기로 했다. 또한 55세 이상인 사무관급 이상간부는 체신부에 잔류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는데, 이는 공무원으로 일생 을 바쳐온 사람들에게 공무원으로 끝마치게 한다는 뜻도 있었으나, 사실은퇴직금의 일시 지급으로 인한 공사의 자금 압박을 염려한 조치였다. 또한 사무관급 이상의 공채자는 체신부에 남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전기통신 관련업무 근무자는 본인의 희망에 따라 선택하도록 했다.

최장관은 이러한 원칙을 정해 놓고 일체의 예외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조회시간을 통해 공언했다.

"7만명의 인원에서 절반을 잘라 공사로 보내는 것은 우리나라 정부수립 이래 최대 인사이동이라 하겠는데, 이처럼 막중한 과제를 놓고 내가 장관으로서 해야 할 일은 공정성을 기하는 일이에요. 따라서 우리가 정한 인사원칙에서 단 한 건의 예외도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그런 분은 없겠지만 혹시 인사 청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반대로 하겠습니다. 내가 하는소리가 절대로 헛소리가 아니란 점을 명심하세요." 공언한 대로 최장관은 정해진 원칙에서 한 건의 예외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공언에도 불구하고 책상 서랍에는 청탁 내용을 담은 메모지가 수북히 쌓였으나 그는 그것을 아랫사람에게 건내주며 처리를 부탁한 일이 없었다.

그의 그러한 정신은 아랫사람에게 그대로 전파되어 차관 이하 간부들도 한 건의 예외를 인정하지 않았다. 오명차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한번은 동기생이 전방에서 지프를 타고 철모를 쓴 채 찾아왔었어요. 자기매부가 공사로 가게 돼 있는데 안가도록 해달라는 부탁이었죠. 사실 그 부탁 은 거절을 못하겠더라구요. 타 부처 장관실에서도 오고, 어디서도 오고 한 메모는 일체 상대를 안했는데 동기생 부탁은 거절하기 어려웠어요. 그런 부탁이 두어건 있었죠.

그래서 웬만하면 들어주려고 했는데 단 한 건일망정 예외를 두게 되면 전체 가 무너지겠더라구요. 할 수 없이 마지막 순간에 원칙대로 하고, 일선에 전화를 걸어 미안하게 됐다며 양해를 구했어요. 그처럼 한사람의 예외도 안두고 원칙대로 인사를 했기 때문에 아무런 잡음없이 넘어갔던 거죠." 7만명의 체신공무원 중 절반을 공무원 신분을 박탈해 신설된 한국통신 사원 으로 보내는 인사는 그렇게 해서 끝났다. 그리고 아무런 잡음이 없었다. 크건 작건 인사 뒤끝에는 으레 쓰다 달다는 잡음이 나오게 마련이고, 그것이조직의 기강해이를 가져오게 되는데, 우리나라 역사상 유례없이 큰 인사 뒤끝이 조용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러한 결과는 새로이 시작하는 한국통신의 순조로운 출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실 7만명이 한꺼번에 뛰면 걷잡을 수 없는 일이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원칙대로 처리해서 아무런 잡음없이 인사를 끝냈다는 것은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는 일이고 여러 각도에서 강조할 필요가 있는 일입니다. 다른 부서에서 는 열명만 인사를 해도 잡음이 많이 나지 않습니까. 그렇게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최광수라는 훌륭한 행정가가 장관으로 있었기 때문이죠."오차관은 그렇게 주장했다.

공사 설립을 앞두고 최광수장관이 고심했던 또 하나의 문제는 재원 확보였다. 공사체제로 바뀔 경우 사원의 보수는 국영기업체 수준이 되는 것을 전제 로했으며 그 중에서도 보수가 가장 좋은 한국전력 수준을 목표로 했다. 그러니까 공무원 보수에 비해 최소한 50%는 인상시켜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인건비의 비중이 40%이던 통신사업의 특성으로 볼 때 엄청난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공사가 발족할 해인 82년부터 시작되는 5차 5개년계획 기간 중에는 5백80만대의 시내전화를 공급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3차 5개년계획 기간의 60만대, 4차 5개년계획 기간의 3백만대에 비해 볼때 엄청난 투자재원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재원 확보 방안으로 가장 손쉽게 채택된 것은 전화요금의 인상이었다. 공사 발족을 반년 앞둔 시점에서 전화요금은 두번 인상되었다. 80년 1월에 시내전화요금이 8원에서 12원으로 50% 인상되었는데, 이듬해인 81년 6월에는 15원 으로, 다시 12월에는 20원으로 대폭 인상되었다. 이와 같은 대폭적인 전화요 금 인상에다 전화의 대량 공급에 따른 이용량 증가로 전화사업의 수입은 예상외로 늘어났다.

또 하나의 재원확보 방안은 공사채 발행이었다. 5차 5개년계획을 수립하는과정에서 체신부는 전화의 대량 공급에 소요될 투자재원 부족을 염려해서 공사가 5차 5개년계획 기간중에 매년 2천억원의 사채를 발행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놓았다.

6백억원의 부채를 안고 출범한 공사는 출범 첫해인 82년에는투자재원의 부족 으로 네 차례에 걸쳐 9백27억원의 통신채권을 발행했는데, 그해 9월부터 자금 사정이 호전되기 시작하여 채권 발행이 중단되었다. 83년에도 2천억원의 사채발행계획이 잡혀 있었으나 발행되지 않았고, 그후로도 발행된 일이 없었다. 이에 앞서 체신부는 79년 12월에 "통신시설 확장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제정 하여 전신전화채권을 발행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89년 12월까지 유효한 이 법의 발효로 10년 동안에 총 1조2천5백억원의 자금을 동원하여 통신시설 확장에 큰 도움을 얻었다.

신설된 한국통신은 그 인원이나 자본금 규모로 보아 유례가 없이 큰 국영기업체였다. 그것과 비교가 될 만한 국영기업체로는 한국전력(주)이 있었는데, 인원에 있어서는 한국통신이 3만8천명으로 한전에 비해 1.7배 많았고 자본금 은 2조5천억원으로 한전의 1조5천억원에 비해 1.7배 많았다. 그러나 매출액 에 있어서는 원자력 발전의 비중이 큰 한전이 2배 가까이 많았다.

따라서 최광수 장관은 신설된 공사를 우수한 실력의 대졸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기업으로 키우려면 출발부터 그에 상응한 보수를 지급해야 하며, 그러려면 최소한 한전 수준의 보수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출범 초년도 의 예산 형편으로는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공무원 봉급과 국영기업체 봉급의 중간 수준으로 하자는 의견을 제시했으나, 한번 결정한 보수 수준은 쉽게 고치기 어렵기 때문에 반대했다. 그 대신 처음부터 국영기업체 수준으로 정하되, 초년도 1월부터 3월 까지는 공무원과 똑같은 월급을 지급하고 4월 이후에 인상된 월급을 지급하는 방안으로 해결했다.

"아무리 따져봐도 첫해부터 인상된 월급으로 지급할 형편이 못됐어요. 그래서 공사는 1월 1일부터 발족하더라도 3개월 늦게 발족한 것으로 생각하자, 4월부터 제대로 월급을 올려주자 하는 방향으로 단안을 내렸어요. 첫해에 월급을 못올려 놓으면 나중에 올린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거든요. 나로서는 자칫하면 큰 욕을 먹을 수 있는 일인데, 그렇게 결정해서 직원들도 납득하고 노조에서도 납득해서 3개월 동안 인상 동결을 했기 때문에 오늘날 봉급 수준이 된 겁니다." 최광수장관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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