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정보통신 비사 소리없는 혁명 (3)

청와대 경제비서실 2급 비서관으로 임명된 오명이 담당한 업무는 체신부와 과학기술처의 전반적인 업무와 국방부의 방위산업, 상공부의 전자산업 분야업무로 상당히 폭넓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 자리는 생각보다 소신을 쉽게 펼수 있는 자리였다. 다른 비서관들은 어떤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김재익수석 과 상의한 다음 그때부터 개념을 정립해 일을 추진해 나갔지만, 처음부터 김 수석으로부터 재량권을 인정받은 오비서관은 첫날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던사항들을 곧바로 집행 단계로 끌고 갈 수 있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빨리 일을 추진할 수 있었다.

"김수석을 모시고 8개월 동안같이 일을 했는데 무척 많은 일을 했어요. 한가 지 일을 손대면 바로 끝내고 또 다른 일을 손대면 바로 끝내고 할 정도였죠.

왜냐하면, 사전에 김수석과 나아갈 방향에 대해 합의가 되어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안일 경우 시간이 나는 대로 차 한 잔을 마시면서 대화를 통해해야 할 일들을 정리해 나갔기 때문에 보고서를 작성해 설명하는 것보다 업무 능률이 굉장히 올랐죠. 구두로 얘기할 경우, 지엽적인 얘기는 젖혀놓고 핵심 적인 문제만을 얘기하게 되고, 둘 사이에 결론이 날 경우, 이쪽에서 알아서 정리해 버리니까 업무가 빨리 진행됐는데, 그런 면에서 김수석은 나를믿어줬고 또 높이 평가해 줬죠." 오명비서관의 이야기였다.

그 무렵 우리나라의 경제정책에 대한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 김재익의 영향 력은 생각보다 막강했다. 그 당시는 국보위가 해체되지 않은 비상시국이었고 전두환은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얼마 안돼 경제 문제에 대해 신경쓸 겨를도 없거니와, 설사 신경을 쓴다 해도 경제 문제에 대해 일일이 간섭할 처지도 못되었다. 게다가 학처럼 깨끗한 성품의 소유자인 가정교사 김재익에대한 신임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었다. 때문에 경제 문제에 관한 한 전적으로 그에게 맡겨 놓다시피 했다.

이처럼 절대권력자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경제수석비서관으로부터충분한 자율권을 인정받은 상황에서 국가의 주요 과학기술정책을 다루게 된것은 평소의 소신을 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게다가 당시는 혁명기였다. 뭔가 혁신적인 개혁을 이룩하여 새 역사의 장을 여는 전환기를 마련해보자는 참신한 기운이 청와대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따라서 관계에 첫발을내딛은 연부역강한 과학도 오명이 경제과학비서관으로서 통신분야에서 가장심혈을 기울여 추진한 일은 전기통신사업 경영체제의 공사화와 데이타통신 전담회사의 설립이었다. 우리나라 통신 발전에 있어 메가톤급의 핵 위력을 발휘하게 되는 이 두가지 사항은 초고속으로 추진되어, 그가 이 문제를 다루 기시작한 지 3개월이 채 못된 1980년 12월에 전기통신사업의 공사화와 데이타통신 전담회사의 설립이 정부의 방침으로 확정되었다.

전기통신사업을 체신부에서 분리해 공사체제로 운영하자는 안은 오명비서관 의 단독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그가 합류할 무렵 경제비서실 내부에는 공사 설립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 그에 앞서 국보위에서도 공사 설립에 관한 검토가 있었는데, 이미 체신부 내부에서 공사 설립에 관한 검토를 마쳐 구체적인 방안까지 마련돼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체신부의 방침 대로 추진하도록 지원한다는 선에서 마무리지웠고, 국보위가 해체되면서 앞으로 추진해야 할 사항으로 데이타통신 전담회사의 설립과 함께 묶어 대통령 경제비서실로 넘겨 놓았던 것이다.

그 당시 청와대 경제비서실에서는 전기통신사업뿐만 아니라 철도사업과 전매 사업의 공사화도 동시에 검토했다. 그런데 전기통신 분야만이 가능했던 것은다른 두 분야는 공사화에 대한 준비가 전혀 없었던 반면, 전기통신 분야는구체적인 설립 방안을 마련해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고양이 목에 방울 을 달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전기통신 분야만이 가능했던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대통령 이하 청와대 경제비서실 팀들이 통신에 대해 일반인의 예상보다 훨씬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전대통령은 평소에 책상 위에 놓인 여러 대의 전화기나 산꼭대기에 세워진 크고 작은 안테나를 가리키며 곧잘 통신의 비능률을 지적했다. 또 전자교환기의 도입 주창자였던 김재익 수석은 통신의 역할에 대해서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던 반면, 다른 두 분야의 사업에 대해서는 공사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을 뿐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신념이 부족했다.

"우연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전대통령이 통신에 대해 관심이 많으셨어요.

반드시공사를 만들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만 왜 책상 위에 전화기가 이렇게 많으냐, 왜 산꼭대기에는 각 기관마다 중계소를 갖고 있고 사람들이많이 올라가 있느냐 하며 통신에 대한 관심 표명이 많으셨어요. 특수 기능이 많아서 그렇다고 대답하면, 그게 무슨 말이냐, 전쟁이 일어나면 어차피통신 공사 사장이 통신감 역할을 해야 할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셨죠. 그러다보니통합의 개념, 통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개념, 따라서 공사체제로 전환시켜 야 한다는 개념이 자주 거론됐죠." 청와대 경제비서실 홍성원 비서관의 이야기였다.

둘째는 청와대 경제비서실내의 체신부 담당 비서관의 인적 구성이 다른 점이었다. 다른 두 분야의 비서관은 그 부처에서 파견된 공무원들이었는데, 체신 부 담당 비서관들은 공무원 경력이 전혀 없는, 어떻게 보면 순진파들이었다.

따라서전자는 공사체제로 전환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여러가지 문제점을 심각하게 고려하게 되지만, 후자는 행정부처의 내부 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옳은 일이면 추진한다는 순수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전화의 경우공급을 하면 그대로 팔릴 때니까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 문제될 게 아무것도없었다. 다만 공급 측면에서 볼 때 장애요소로 되어 있는 것이 공무원체제가 지니고 있는 예산이나 인력 운용상의 제약 요소인데, 그것을 제거해 주는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결론에 쉽게 도달할 수 있었고, 그러한 판단이 내려지자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보다 결정적인 요인은 다른 두 분야는 공사화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반면 전기통신 분야는 체신부에서 구체적인 설립 방안까지 마련해놓고 있었던 것이다.

공중전기통신사업의 경영체제를 공사 형태로 전환한다는 것은 1957년 정부 기구의 개혁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거론된 것이 문제 제기의 시초였다. 그때 전기통신사업과 철도사업을 국영기업 형태로 전환하되 그 전단계로 전기통신 청이나 철도청과 같은 외청으로 개편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이는 논의에 그치고 말았다.

1960년대에 들어 행정개혁조사위원회에서 공사화 문제를 공식적으로 다루면서 그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즉, 그 위원회는 1965년 민간연구기관인 한국산업능율본부에서 작성한 연구보고서를 토대로 전기통신사업의 경영체제 개편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1968년까지 가칭 전신전화공사를 설립할 것을 건의했다. 그 후 1968년 체신부의 용역에 의해 한국경제개발협회에서 작성한 보고서도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한 그 무렵에 설치된 공사제도연구 위원회는 1968년부터 1971년까지 계속된 작업을 통해 앞의 연구보고서를 토대로 하여 공사제도화의 당위성, 바람직한 공사의 모형 등을 제시하고 공사 화 시기 등 구체적인 계획을 입안하려는 단계에서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때까지의 준비는 상아탑적인 연구보고서의 작성에 불과했다. 또 공사화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끼는 체신부의 간부는 많지 않았고 반드시 공사화해야 한다는 공감대도 형성돼 있지 않았다. 그러한 체신부 간부들에게 공사화의 필요성을 실감나게 인식시켜 준것은 전자교환기의 도입이었다.

그렇다면 전자교환기와 공사화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그 이유는 간단하다. 전자교환기와 기존의 기계식교환기는 전혀 다른 기술이었다. 후자가 구식 기술이라면 전자는 신식 기술이었다. 기계식교환기를 다루는 기술자에 게 전자교환기를 다루라고 하는 것은 마치 진공관 라디오 기술자에게 컬러TV 를 다루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전자교환기는 그만큼 고급 기술이었다. 따라서 고급 기술자를 확보하려면 그만큼 많은 봉급을 주어야만 한다. 그러나 공무원의 봉급을 인상하는 것은 기존의 공무원체제로는 불가능했다. 게다가 전자교환기를 도입하게 되면 연간1 00만대 이상의 전화 공급이 가능하게 되지만, 그 엄청난 물량을 수입.통관.

시설하려면무엇보다 예산이나 회계상의 융통성 확보가 선행되어야 했다. 그러나 기존의 공무원체제로는 그것의 확보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당시의 체신부 계획국장 정규석은 열렬한 전자교환기 도입 주창자였던 경제 기획원 경제기획국장 김재익을 만나 공사화가 전제되지 않은 전자교환기의 도입은 생각할 수 없다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전기통신을 컨덴서나 레지스터, 코일, 진공관 등의 부품으로 배웠는데, 지금은 대학에서 회로로 배웁니다. EMD나 스트로저 등 기계식교환기는 기계적으로 동작하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있어요. 따라서 체신부 기술자들이 유지.보수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전자교환기가 되면 눈으로 보이는 게 하나도 없어요. 따라서 고급 기술자가 필요하다는 얘기인데, 전자교환기를 운용할 수 있는 기술자를 현재의 공무원 봉급 가지고 채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시 말해, 현재의 공무원 봉급 체계나 인사제도, 조직을 가지고는 도저히 전자교환기를 운용해 나갈 수 없다는 거죠." 전자교환기의 도입이 정부의 방침으로 확정된 것은 1977년 9월이었다. 도입 기종으로는 미국의 다국적기업인 ITT의 벨기에 현지법인인 BTM의 M10CN이 선정되었는데 1978년 6월에 BTM과 2만회선의 구매계약을 체결하여 서울의 영동전화국과 당산전화국에 각각 1만회선씩 설치하기로 했다. 이 전자교환방식 의 개통에 대비하여 체신부는 별도의 운용요원을 벨기에에 파견하여 생산 현장에서 기술 전수를 받도록 했다.

그와 동시에 공사 설립을 위한 준비작업을 시작했는데, 그 내용은 1979년 2월에 실시된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즉, 1979년도 업무 계획에서 체신부는 "경영체제의 개선"이라는 제목하에 전화시설의 가속적인 팽창으로 통신사업이 경영의 전환기를 맞았다고 강조했다.

즉, 경영상의 당면 문제점으로는 첫째, 행정기능과 사업기능이 혼재돼 있어적극적인 통신정책을 펼치기 어려우며 둘째, 관청조직이 지니고 있는 예산.

인사.조직관리의 경직성 때문에 서비스 및 기업성에 제약을 받으며 셋째, 공무원의 낮은 보수 수준 때문에 우수한 기술인력을 확보하기 어렵고, 그 결과이직률이 높아지고 있어 시설 확장에 따른 인력 수급에 차질이 예상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구체적인 개선 방안으로 조사전문기구를 설치하여 선진 외국제도를 비교 연구한 다음 체제 개편의 모형을 정립하겠다고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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