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논단] 문화를 쏘아올리자

52년 여름밤. 6.25전쟁이 한창이던 때의 이야기다. 나는 그때 열네 살이었다. 고만고만한 꼬마들이 동리밖 느티나무 아래서 전쟁터에서 운 좋게 하루휴가를 나온 형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형은 대학3학년때 전쟁이 나자 통역장교로 입대해서 미군부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형은 여러가지 전쟁 이야기를 들려준 후 문득 이런 말을 하였다.

"지금 미국에는 활동사진을 방안에서 볼 수 있는 기계가 있다. 크기는 사과 상자만한데 활동사진과 목소리가 함께 나오는 기계다. 너희들이 늙어 죽기전 에 어쩌면 우리나라에도 들어오게 될 것이다" 흑백TV에 대한 이야기였다. 1952년, 국민소득이 몇 달러인지 계산조차 안되던 나라에서, 전쟁이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던 그 시절, 그 형이 흑백TV시대 를 너희들이 늙어 죽기전이라고 예측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그로부터 꼭 10년후인 61년 12월 31일. KBS가 개국되었다. 64년에 TBC 69년에 MBC,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의 흑백TV시대가 70년대에 도래하였다.

이 시절 TV 채널은 셋, AFKN을 합쳐 4개였다.

우리의TV채널이 3개이던 70년대 흑백TV시대는 낭만이 있었다. 우리들은 역도산이나 천규덕, 장영철 같은 레슬링선수들이 게임을 하는 날이면 구장집으로 이장집으로 몰려다니며 구경을 했다. 집집마다 TV가 없던 시절의 추억 이다. 나는 그 시절 20여년전 느티나무 아래서 신화처럼 들었던 그 요술상자 를 파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흑백 TV시대는 80년 12월 1일 컬러방송이 시작되자 몇년만에 끝나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기술의 이전은 스피드화하기 시작했다. 안방에서 두 다리를 뻗고 즐길 수 있는 문화놀이의 종류와 방법은 다양해져 갔다. 컬러TV시대에서 VTR시대, 캠코더시대, VCR시대, 와이드TV시대, 시네마TV시대, 노래방TV시대.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TV채널숫자가 늘어가는 것이다. 91년 SBS개국으로 우리가 볼 수 있는 채널이 6개이던 것이 95년 3월 1일 21개의 CATV채널이 추가됨으로써 별안간 27개로 늘어났고, 지금도 안테나만 올리면시 청이 가능한 외국의 위성TV채널이 19개나 된다.

그리고 금년말안에 우리는 우리나라의 위성인 무궁화1호와 2호를 발사할 예정이다. 이렇게 해서 97년말까지 우리가 집에 앉아서 시청할 수 있는 TV채널 수는 일반TV 6개, CATV 26개, 그리고 위성방송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이 국내 12개정도, 홍콩.일본의 것을 중계해서 볼 수 있는 채널이 1백개정도로 도합 1백50개 채널이 된다.

이 시대를 상상할 수 있는 첫번째는 철저한 개인화다. 집안식구 모두가 모여서 웃고 즐기던 시절이 가고, 자기가 좋아하는 채널과 프로를 선택해서 자기 방에서 혼자서 보는 가정이 될것이다.

다음은고유문화의 붕괴현상이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약 1백50개의 채널을 통해서 외국의 문화가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려올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괴이한 풍속들이 우리의 전통과 고유 풍속을 파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문화가 우성이면 살아남을 것이고, 열성이면 없어질것이다. 잡종문화 의 소나기를 역류해서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의 비상처럼 우리는 우리의 문화를 만들어 하늘로 쏘아 올려야 할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충분히 대비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이문제는 요즈음 이야기되고 있는 정보고속도로.컴퓨터.통신, 그리고 멀티미디어의 개념을 초월하는 개념이 될 것이다. 사람을 2차원으로 보면 뼈는하드웨어이고 살과 피는 소프트웨어일 것이다. 그러나 3차원으로 보면 뼈.

살.피모두가 하드웨어이고 정신이 진정한 소프트웨어가 될 것이다.

정보통신의 시대를 여기 비유하면, 컴퓨터.통신.정보고속도로.멀티미디어의 요소중에서 눈에 보이는 기계적인 요소를 하드웨어라 하고 그 운용체계를 소프트웨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해 진정한 소프트웨어는 정보통신망을 타고 흐르는 정보, 인간의 정신, 문화라고 봐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Hard"한 부문에서 선진국에 뒤져 있고, 또 그것을 퍽 염려하고 있다. 그것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진정한 "Soft" 시대에 대비해 야 한다. 우리의 문화를 보전하고 갈고 닦아서 하늘로 쏘아 올릴 수 있어야우리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정보통신진흥협회 회장>


브랜드 뉴스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