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킨토시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5)

빌 게이츠는 시머니와 같은 우수한 프로그래머들을 많이 고용했다. 그는 어느 회사보다도 높은 봉급과 주식 배당 등으로 이들을 매수했다.

그러나 그 동기는 PARC를 재창조하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게이츠는 이들을 자신의 사업 과제인 응용제품개발에 이용했다.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나온 제품은 파생적이고 독창성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로그래머들은 공개 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마이크로소프트가 최고의 기술적인 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 회사는 프로그래머들이 어떠한 제품을 개발하든지간에 거기에서 상업적 가치를 최대한으로 뽑아내는환경이다. 이는 프로그래머들이 개발실적에 대해 동료전문가들로부터 인정받는 대신 상업적 목적을 위해 이용된다는 조건을 스스로 수락한 파우스트의 계약인 것이다.

PARC는 자체적인 세계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자기기만에 빠졌는지도 모른다. PARC의 경영진은 자기들만이 세계 최고의 컴퓨터 과학자들을 모아놓았다고 믿는 오류를 범했다. 79년 PARC의 간부인 래리 테슬러는 상관 인 로버트 테일러와 언쟁을 벌였다. 테일러는 PARC에는 명석한 사람들이 모두 집결되어있으며 PC기술을 선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대해 테슬러는 다른 곳에도 똑똑한 사람들은 있을 수 있다고 반박했다.

"그럼 그 사람들을 채용하게." 테일러는 말했다.

테슬러는 PARC밖의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모두 다 데려올 수는 없습니다.

-수백명도넘습니다. 똑똑한 사람들은 사방에 널려 있다구요." 화가 난 테슬 러는 결국 PARC를 떠나 그가 만났던 "똑똑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기로 결심 했다. 그들이 바로 애플컴퓨터사를 설립했던 스티브잡스와 몇 명의 엔지니어 들이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PARC가 이루어낸 성과 덕택을 가장 많이 본 사람은제록스 내외를 막론하고 스티브 잡스를 따를 이가 없는 것 처럼 보인다. 신화는 이렇게 전개된다.

79년 어느날, PARC 관리자들은 잡스를 비롯한 애플사 사람들의 PARC방문 요청에 대해 아무런 경계심없이 이를 허락했다. 제록스가 PARC 연구원들이 개발해낸 알토와 다른 기술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바로 그때에 잡스가 나타난 것이다. 잡스는 알토를 한번 보고는 상용화 설계 의 중요성을 간파했다.

"이것을 가지고 왜 아무것도 안합니까?" 그는 PARC측에 물었다. "이건 정말굉장합니다. 가히 혁신적입니다." 그는 알토와 같은 제품을 개발해야 한다는확신을 가지고 회사로 돌아와 곧 래리 테슬러를 PARC에서 끌어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매킨토시가 개발됐고, 잡스는 제록스가 해낼뻔 했던 상업적 성공을 거두게 된 것이다.

PARC의 창조신화처럼 스티브잡스가 PARC의 지적인 보석을 애플로 훔쳐간 사실은 그리좋은 선례는 아니다. 거기에는 중요한 구체사항이 결여되어 있을뿐 아니라 잡스를 필요이상으로 사악하거나 선견지명이 있는 인물로 평가하기 쉽기 때문이다.

지적재산의 도둑행위로 낙인 찍힌 79년, 스티브잡스의 PARC방문에 얽힌의혹을 생각해 보자. 몇 가지 사실을 잠깐 들여다보면 그 사건을 다른 시각 에서 볼 수 있다.

당시 PARC의 관리층은 외부인의 연구소방문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70년대초까지만해도 PARC는 외부에 개방적이었다. 연구소 건물은 스탠퍼드대학과 자전거로 왕래할 수 있는 거리에 세워졌기 때문에 PARC의 간부들은 스탠퍼드 인공지능 연구소 및 기타 다른 학과의 동료들과 자유 로이 왕래하곤 했다. 원래 PARC에는 보안통제가 없었으며, 대학 캠퍼스 처럼 공개된 곳이었다. 심지어 71년 자체 회의에서 PARC소속 친구를 따라 온 스탠퍼드 인공지능 연구소 연구원이 제안을 하기도 했는데, 제록스의 잭 골드먼 연구팀장은 그 사람이 외부 방문객이라는 것도 모르고 그의 제안 에 찬사를 보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연구원들은 모르는 척하며 웃음을 참아야했다. 이같은 태평세월은 72년 장발의 PARC프로그래머들에 대한 기사가 롤링스 톤지에 게재되면서 갑자기 중단되었다. 연구원이었던 앨비 레이 스미스는 훗날 그 기사가 제록스사 본부를 크게 진노케했다고 회고했다. "연구소에 있는이 장발의 망나니들이 모두 기사에 나왔다니-어찌나 당혹스러웠던지." 잭 골 드먼은 캘리포니아로 날아가 긴급 회의를 열고 롤링스톤지 기사같은 것이 한번 더 나오면 제록스는 연구소 문을 영원히 닫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후PARC에 대한 기사는 통제되었으며 PARC 연구원들의 기술적인 연구기 사도 상당 수준 격감되었다.

활자로 발표할 기회는 없어졌지만 자신의 실적을 동료들에게 자랑하고 싶은PARC의 연구원들은 방문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설명회를 통해 외부세계와 교류를 가졌다. PARC의 핵심이었고 훗날 애플 컴퓨터의 "무임소장관"이 되었던 앨런 케이는 "설명회"를 PARC의 일상생활로 표현했다. 잡스의 유명한 방문이 있기 4년전인 75년, 다양한 크기의 그룹으로 이루어진 약 2백여 명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가졌다. 나중에는 많은 방문객을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 소모적이라고 판단, 설명회 횟수를 어느정도 줄이게 되었다.

그러나 초기의 방문객중 일부는 설명회에서 본 것을 상품화해야겠다는 착상 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잡스는 그런 초기 PARC방문자중 하나는 아니었다. 잡스의 방문이 다른 사람들의 방문과 다른점이 무엇인가는 케이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방문객 중 억만장자나 20대의 회사 사장인 사람은 별로 없었다. 따라서 PARC를 방문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아트를 타고 돌아가서 "그래, 이게 바로 우리가 원하는거야"라고 말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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