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취 11

부도의 위기에서 소유주가 바뀌면서 가까스로 고비를 넘기긴 했으나 양양 전지의 행로는 이후에도 그리 순탄치 못했다.

안팎으로산재한 난관을 헤쳐 나가기엔 자금력, 영업력 등 모든 면에서 양양 의 힘이 너무 미약했다.

한번 기울어진 사세는 쉽게 회복되지 않고 자꾸만 기울고 있었다. 직원들도 하나 둘 양양을 떠나갔다.

그런데이즈음 양양의 운명을 바꿔 놓을 수 있는 일이 생겼다.

소유주가바뀌기 이전부터 진행해온 리튬전지가 85년 개발된 것이었다. 양양 은 버튼형 알카리전지에 이어 이를 전자전에 출품, 상공부 장관상을 수상 하는 영예를 또 한 번 맛볼 수 있었다.

낚시찌에사용되는 가장 초보적인 기술의 리튬전지이긴 했지만 국내 최초의 리튬전지 개발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더욱이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판이었던 양양의 입장에선 미래의 서광으로 비쳤을 일이었다.

틈새 상품으로 내놓은 단추형 알카리 전지의 급격한 판매 감소를 대신할 새로운 전략 상품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호남전기와 서통의 틈새에서 설자리를 잃고 있던 양양으로선 리튬전지 전문 업체로 변신, 재기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다.

양양은곧바로 파이럿트 설비를 갖추고 낚시찌용 리튬전지를 생산, 판매하기 시작했다. 시장규모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낚시찌용을 발판으로 새로운 리튬전지 개발을 강화해갈 계획이었다.

양양의전무로 남아있던 설립자 김용철씨도 새소유자가 된 김영성씨를 도와 이 일에 매달렸다.

비록이젠 그의 소유가 아니지만 자신이 설립했던 회사를 크게 키워보고 싶었다. 어쩌면 그 일을 통해 자신의 실추된 명예도 회복할 수 있고 재기의 발판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신은 그의 편을 들지 않았다. 양양이 한창 재도약의 몸짓을 보이고있을 때 뜻하지 않았던 사고가 발생했다. 양양의 소유주인 김영성씨가 사망 한 것이다. 이 때가 그가 양양의 새 주인이 된 지 2년이 지난 87년의 일이었다. 양양은 또다시 주인이 바뀌는 운명을 겪어야 했다.

김영성씨가작고한 후 양양은 그의 형인 김영배씨에 인수됐다.

양양은또 한차례 혼란을 경험할 수 밖에 없었다.

낚시찌용리튬전지의 생산은 어렵게 계속됐지만 그동안 명맥을 유지해온 버 튼형 알카리전지의 생산은 완전 중단됐다.

새로운투자의 열기는 급속히 위축됐다.

이과정에서 김용철씨도 양양을 떠나야 했다.

김용철씨는 "새 주인이 된 김영배씨에게 투자를 권유했지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요. 그동안 해온 노력이 아깝고 안타깝긴 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지요. 더 이상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지요"라고 회고했다.

결과적으로이 일로 인해 양양은 재도약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고 국내 리튬 전지분야의 발전도 상당히 지체되는 결과를 낳았다.

양양은현재까지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나 주변의 관심과 기대와는 달리 그 명성이 날로 쇠퇴하면서 이제는 그런 업체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더많을 정도다.

양양이짧은 기간동안 두차례나 주인이 바뀌는 변화를 겪는동안 로케트.서통등 다른 전지업체의 변화도 적지 않았다.

호남전기는82년 현재의 상호인 주식회사 로케트전기로 상호를 변경 하고 이해 방글라데시에 건전지 플랜트를 첫 수출한 데 이어 83년 수출 1천만달러를 돌파했다. 로케트 전기는 또 같은해 최신 알카리전지 제조설비를 도입, 가동에 들어가이듬해 연간 매출액 2백억원 86년에 3백억원을 돌파하는 등 경영권 인수 및서통의 시장진출로 인한 70년대말~80년대초에 걸친 혼란에서 완전히 벗어나성장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서통도망간전지에 이어 82년부터 일본 후지전지와 기술제휴해 알카리 전지 의 생산에 본격 참여하는 등 그동안 닦은 시장기반을 더욱 확고히 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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