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민의 비욘드 차이나] 국가 연구실을 평가기관에서 전략기술·산업공통기술 공급자로 바꾸는 구조개혁
중국 대학과 연구기관을 평가할 때 국가중점실험실 보유 여부가 자주 등장한다. 이름만 보면 우수한 연구실에 간판과 연구비를 주는 제도처럼 보인다. 그러나 최근 중국이 추진한 국가중점실험실(国家重点实验室)에서 전국중점실험실(全国重点实验室)로 재편은 명칭 변경이 아니다. 연구과제를 대학과 교수의 성과 단위가 아니라 국가 전략임무와 산업 문제 중심으로 다시 묶는 작업이다.
중국은 기존 실험실을 재평가해 통합·신설·조정하고, 대학·연구기관·기업이 함께 운영하는 형태를 늘렸다. 기초연구를 유지하면서도 핵심기술, 산업 공통기술과 실증으로 연결되는 책임을 강화한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전국중점실험실 재편 본질은 우수 연구실에 자원을 더 주는 데 있지 않고, 국가가 풀어야 할 장기문제에 대학·연구기관·기업 인력과 시설을 다시 배치하는 데 있다.

국가실험실(国家实验室)은 국가 최고 수준 전략 연구거점이다. 양자정보, 인공지능(AI), 생명과학 등 장기적·전략적 분야에서 국가 임무를 수행한다. 숫자가 제한적이고 국가 차원의 조직·자원배분 기능이 강하다.
전국중점실험실은 대학·연구기관·기업에 설치돼 특정 학문과 기술영역 핵심 임무를 수행하는 네트워크다. 기존 국가중점실험실이 전국중점실험실로 재편됐지만 모든 실험실이 단순히 이름만 바뀐 것은 아니다. 임무와 조직, 참여기관, 평가방식이 다시 설계됐다.
2024년 중국 과학기술 부문은 전국중점실험실 재편이 기본적으로 완료됐다고 밝혔다. 이후에는 동적 평가와 조정, 국가전략·산업수요와의 정합성을 높이는 단계로 넘어갔다.
기존 제도는 중국 기초연구 역량을 키우는 데 기여했지만 문제도 누적됐다. 대학 학과와 교수집단을 중심으로 실험실이 운영되면서 연구 주제가 분산되고, 설립 이후 장기간 간판이 유지되며, '선정은 중요하지만 운영관리는 약하다'는 비판이 나왔다.
국가 전략과 산업수요가 빠르게 바뀌는데도 실험실 임무와 인력 구조가 그대로인 경우가 있었다. 여러 기관이 비슷한 장비와 연구 주제를 중복 보유하고, 기업과 연결은 공동논문·과제 수준에 머물기도 했다.
재편은 이 문제를 세 가지로 바꾸려 한다. 연구 방향을 국가 임무 중심으로 재정의하고, 대학·연구기관·기업이 공동으로 책임지게 하며, 평가 결과에 따라 조정·퇴출할 수 있도록 한다. 실험실을 종신 간판이 아니라 성과와 임무에 따라 움직이는 국가 연구조직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전국중점실험실은 '무엇을 연구하는가'보다 '어떤 국가문제를 해결하는가'를 강조한다. 기초원리, 핵심기술, 공통기술과 응용검증을 하나의 임무선에 놓는다. 연구 주제는 반도체·산업제어·첨단소재·바이오·에너지·로봇·정보보안 등 전략 분야와 연결된다.
임무 중심은 단기 사업화만 의미하지 않는다. 기업이 당장 투자하기 어려운 장기 기초연구를 국가가 지원하되, 연구성과가 다음 단계의 기술 플랫폼과 인력양성으로 이어지도록 책임을 명확히 한다.
실험실은 연구과제를 내부 연구자에게 나눠주는 기관이 아니라 외부 대학·기업과 공동과제를 조직하고, 장비와 데이터, 인재를 개방하는 허브가 돼야 한다. 중국이 '개방과 협력'을 평가항목으로 강조하는 이유다.
재편의 중요한 변화는 기업 참여다. 중국은 선도기업이 대학·연구기관과 전국중점실험실을 공동 건설하도록 장려한다. 기업은 산업 문제와 공정데이터, 시험환경과 시장수요를 제공하고, 대학은 원천기술과 연구인력을, 연구기관은 공통기술과 대형장비를 제공한다.
산업제어기술 전국중점실험실(工业控制技术全国重点实验室)은 저장대, 화둥이공대와 중쿵테크(中控技术·SUPCON)가 함께 구축한 사례다. 산업제어의 기초이론부터 핵심 장비·소프트웨어, 공정적용까지 대학과 기업이 역할을 나눈다.
기업 참여는 연구 실제성을 높이지만 이해상충도 만든다. 선도기업이 실험실 의제와 인재를 독점하거나 경쟁사 접근을 막을 수 있다. 기업 단기제품 개발이 장기 기초연구를 밀어낼 위험도 있다. 공동 건설이라도 연구과제 선정과 장비개방, 지식재산권 규칙을 투명하게 해야 한다.
전국중점실험실이 논문과 특허에서 끝나면 산업시스템은 완성되지 않는다. 연구성과는 제조업혁신센터의 공통기술 개발, 파일럿 플랫폼 공정검증, 시험인증과 첫 제품 조달로 이어져야 한다.
중국이 대학 기술사업화, 전국중점실험실, 제조업혁신센터와 파일럿 플랫폼을 동시에 재편하는 이유도 이 연결에 있다. 실험실은 원리와 핵심기술, 혁신센터는 산업 공통기술과 통합, 파일럿은 생산공정, 시험인증은 시장증거, 첫 제품 정책은 초기수요를 담당한다.
같은 기관이 모든 단계를 맡는 것이 아니라 기능별 조직이 역할을 나누되 데이터와 인력이 이동해야 한다. 전국중점실험실 성과는 자체 기업을 몇 개 만들었는지가 아니라 다음 조직이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인재·표준·장비를 공급했는지로 평가해야 한다.
전국중점실험실은 국가 명단이지만 지방정부의 산업전략과도 밀접하다. 상하이는 집적회로·바이오·AI, 선전은 정보통신·로봇·신소재, 항저우는 디지털·산업제어, 허페이는 양자·에너지·AI 같은 지역 강점과 실험실을 연결한다.
지방정부는 연구 공간과 인재 주택, 장비·공동연구원과 산업펀드를 제공하고, 실험실 주변에 기업과 인큐베이터를 모은다. 국가 연구자원과 도시 산업수요를 연결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모든 도시가 전국중점실험실을 유치하려 하면 간판 경쟁과 중복투자가 생긴다. 실험실 유치가 지역기업의 기술 문제 해결과 인재 정착으로 이어지는지, 단순 건물·장비 확충에 머무는지 봐야 한다.
첫째는 과제 지속성이다. 국가전략이 바뀔 때마다 연구 방향을 단기적으로 흔들면 장기 기초연구가 불가능하다. 임무 중심과 안정적 연구환경을 함께 보장해야 한다.
둘째는 개방성이다. 외부 중소기업과 연구자가 장비·데이터·전문가를 실제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공동 건설 대기업 내부 연구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
셋째는 인재 이동이다. 실험실 연구자가 대학·기업·혁신센터 사이를 이동하고, 공동 학생·엔지니어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
넷째는 후속 전환이다. 특허 수보다 공통기술, 표준, 라이선스, 파일럿·첫 고객으로 이어진 경로를 봐야 한다.
다섯째는 동적 평가다. 실적이 약한 실험실을 조정할 수 있어야 하지만, 단기 매출과 논문 수만으로 퇴출하면 고위험 연구가 사라질 수 있다.
중국의 강점은 국가가 전략 분야에 장기자원을 집중하고 대학·연구기관·기업을 하나의 임무로 묶는 동원력이다. 병목은 국가 임무가 연구 자율성과 기업경쟁을 압도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정책 우선순위가 연구 주제를 지나치게 좁히면 비주류 기초연구와 예상하지 못한 혁신이 줄어든다. 평가·보고가 늘면 연구자가 행정에 시간을 쓰고, 기업이 참여하면 지식재산권과 데이터 비공개가 강화될 수 있다.
전국중점실험실 성공은 숫자와 명칭이 아니라 장기 기초연구와 산업 문제 사이 긴장을 어떻게 관리하는지에 달려 있다.
전국중점실험실 재편 성과를 판단하려면 단순한 논문·특허 건수보다 임무 수행경로를 봐야 한다. 전략기술 핵심 지표를 얼마나 개선했는지, 공통 연구시설을 외부에 개방했는지, 기업과 공동으로 만든 기술이 파일럿·표준·제품으로 이어졌는지, 젊은 연구자와 기술사업화 전문인력이 성장했는지를 함께 평가해야 한다.
연구 장기성과 산업 단기수요를 모두 요구하면 실험실이 두 목표 사이에서 흔들릴 수 있다. 따라서 기초원리·공통기술·응용검증을 구분하고 각 단계에 다른 평가 주기와 책임을 부여해야 한다. 기업이 공동 건설 주체로 들어오더라도 특정 기업의 단기 개발 조직이 되지 않도록 연구 주제 선정, 데이터·지식재산권과 시설접근 규칙을 공개해야 한다.
또 동적 평가는 필요한 장치지만, 지나치게 잦은 재편은 연구팀의 장기 축적을 해칠 수 있다. 실험실 임무가 국가전략과 맞지 않을 때는 통폐합만이 아니라 다른 기관과 공동 운영, 단계적 전환과 시설 공유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국가연구실 경쟁력은 이름과 간판보다 연구자와 장비, 데이터가 지속적으로 축적되는 데서 나온다.
외국 대학·기업은 공동연구, 국제프로젝트, 장비사용과 현지 연구개발센터를 통해 중국의 전국중점실험실과 접점을 만들 수 있다. 다만 참여 가능성은 기술 분야와 보안등급, 데이터·샘플의 국경 간 이전, 연구성과 귀속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공개형 기초연구와 전략기술 프로젝트를 같은 방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한국 기업은 중국 대학·실험실 명칭보다 실제 운영 주체, 공동 건설 기업, 주요 장비, 연구과제와 사업화 경로를 확인해야 한다. 공동연구 계약에는 배경 기술과 신규성과 소유권, 논문공개, 특허출원 국가, 소프트웨어·데이터 접근, 인력 이동을 명확히 규정해야 한다.
한국 정부와 대학도 중국 실험실을 단순 경쟁상대로만 볼 필요는 없다. 기후·에너지·의료·표준처럼 공동이익이 큰 분야에서는 장비와 데이터의 상호검증, 공동표준 제안이 가능하다. 반면에 반도체·AI·우주·방산 관련 기술은 수출통제와 연구 보안을 전제로 협력 범위를 세밀하게 나눠야 한다.
한국에도 국가연구소, 글로벌 선도연구센터, 출연연과 대학의 대형 연구사업이 있다. 그러나 과제 종료와 함께 인력·장비·데이터가 분산되고, 산업수요와 후속 파일럿이 별도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정부는 국가전략연구실 임무를 기초연구-공통기술-파일럿-표준으로 연결하고, 모든 단계를 한 기관이 독점하지 않도록 역할을 나눠야 한다. 지자체는 연구거점을 유치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지역기업의 기술 수요와 장비 공유, 후속 투자를 연결해야 한다.
대기업은 공동연구에 참여하되 의제·데이터·특허를 독점하지 않고, 중소기업이 이용할 수 있는 공통기술과 시험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금융권은 실험실 이름보다 기술성숙도와 후속 사업화 경로를 봐야 한다.
대학은 논문·특허뿐만 아니라 외부 장비 이용, 공동인재와 산업표준을 연구성과로 인정해야 한다. 스타트업은 국가연구실의 기술을 이전받을 때 권리와 데이터, 연구자 참여, 후속 검증 비용을 확인해야 한다.
중국 전국중점실험실 재편에서 배울 것은 국가가 연구주제를 더 세게 통제하는 방식이 아니다. 장기문제에 필요한 인력·장비·기업을 임무 중심으로 묶고, 연구성과를 다음 산업조직으로 넘기는 구조다. 한국은 국가연구실을 우수 연구자의 간판으로 남길 것인가, 아니면 기초연구가 산업공통기술로 이동하는 책임 있는 플랫폼으로 만들 것인가.
박지민 36kr코리아 공동 대표 3guowill@krstar.c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