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여름 유럽의 폭염으로 지난달 말 한 주 동안 유럽에서 평년보다 1만명 넘게 더 사망했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65세 이상이었다. 기후변화 대응을 주도해 온 유럽이 정작 기후변화의 결과에는 충분히 대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덥지 않은 여름을 보내면서 다른 나라에 온실가스 감축을 준엄히 요구해 온 유럽이 이제야 그 어려움을 체험한 셈이다.
유럽의 가정용 에어컨 보급률은 약 20%다. 한국에서는 에어컨이 사실상 필수품이지만 유럽은 그렇지 않았다. 여름이 짧고 습도가 낮았던 데다 에어컨을 자연을 거스르는 과소비로 보는 문화도 강했다. 그러나 폭염이 반복되자 프랑스에서는 에어컨이 정치적 쟁점이 됐다. 한쪽은 학교와 병원, 노인시설부터 냉방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쪽은 에어컨이 전력 피크와 도심의 열섬현상을 키우고, 지구온난화지수가 높은 냉매의 사용과 누출을 늘릴 수 있다고 반박한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에어컨을 켜야 하는데, 그 에어컨이 다시 지구를 덥힐 수 있다는 것이 에어컨 패러독스다. 그런데 파리의 현실은 이 정치 및 이념 논쟁보다 더 구체적이다. 오래된 공동주택에서는 에어컨을 달고 싶어도 벽에 마음대로 구멍을 뚫을 수 없다. 실외기가 건물 외관을 바꾸면 사전 신고가 필요하고, 공동주택의 동의와 도시경관 규정까지 검토해야 한다. 한국과는 달리 파리에서 벽에 구멍 하나 뚫는 일은 행정행위라 한다.
그 틈을 가장 빨리 읽은 곳은 중국이다. 올해 상반기 중국의 대 유럽연합(EU) 에어컨 수출은 전년보다 43.2% 늘어났다. 특히 별도의 실외기 공사 부담이 작은 이동식 제품이 빠르게 팔렸다. 중국 업체는 유럽의 낡은 건축물과 까다로운 설치 규정을 제품의 약점이 아니라 시장의 조건으로 받아들였다. 중국계 매체 설명은 여기서 한발 더 나간다. 유럽은 중국의 과잉생산이 자국 산업을 위협한다고 비판하지만, 폭염이 닥치자 중국산 에어컨을 찾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중국의 생산력이 유럽인을 폭염에서 구한다는 서사다. 꽤나 도발적이다. 그렇다고 전혀 근거 없는 주장도 아니다. 중국은 에어컨만 수출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중국의 과잉생산이 아니라 유럽의 낡은 규제와 공급 부족'이라는 프레임까지 함께 수출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디에 있는가.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세계적인 수준의 에어컨과 냉난방 히트펌프 기술을 갖고 있다. 효율이 높고, 조용하고, 디자인도 좋다. 인공지능(AI)으로 사용자의 생활패턴까지 학습한다. 제품 설명서만 놓고 보면 부족할 것이 없다. 그런데 유럽의 냉방 논쟁이 커질수록 한국 기업이나 언론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민간기업은 그렇다 치고, 정책 당국은 어떤 생각이 있는가? 유럽의 오래된 건물을 어떻게 냉각할 것인가. 실외기를 설치하기 어려운 공동주택에 어떤 대안을 제시할 것인가. 냉매 규제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냉난방 통합 히트펌프와 저온난화 냉매를 어떻게 보급할 것인가. 전력망 부담을 줄이면서 취약계층의 냉방권은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우리는 이런 질문에 제품이 아니라 산업과 정책 언어로 답하고 있는가.
유럽의 냉방 시장은 건축물 개보수, 설치 인력, 유지관리, 냉매 회수, 에너지효율, 전력 수요관리, 표준과 인증이 함께 움직이는 시장이다. EU의 F가스 규제는 강화됐고, 히트펌프와 냉방기기는 이제 탄소중립 정책과 건물 에너지정책의 일부가 됐다. 냉방은 가전산업의 계절 특수가 아니라 기후적응 산업이다.
한국은 중국보다 에어컨를 더 많이 만들 수도 없고 더 싸게 팔 수도 없다. 승부처는 히트펌프와 냉난방 통합 시스템, 설치 인프라, 유지관리, 표준과 인증, 탄소배출까지 하나의 산업으로 묶어내는 전략이다. 기업이 제품을 만드는 동안 정부는 시장의 규칙을 읽고, 기업은 그 규칙을 바꾸는 논의에 함께 들어가야 한다.
파리 사람들은 지금도 복잡한 제도와 문화 때문에 이동식 에어컨을 찾는다. 그 벽 앞에서 중국은 새로운 시장, 무역질서를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제품을 설명하고 있다. 세계 시장은 성능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때로는 프레임이 제품 자체보다 더 큰 경쟁력이 된다.
박용진 KIS자산평가 ESG사업본부장 yongjin.park@kispricing.com
변상근 기자 sgbyun@et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