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10미터에 달하는 한지 두루마리 형태의 논문이 전 세계 예술계와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총장 이광형)은 이진준 문화기술대학원 교수의 옥스퍼드대 박사논문 '빈정원 - 어디에나 있는,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의 리미노이드 여행(2020)'이 영국 애쉬몰린 박물관에 한국 현대 작가 최초로 정식 구입 및 영구 소장·전시된다고 26일 밝혔다.
애쉬몰린 박물관은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등 거장들의 작품을 소장한 곳으로, 생존 작가 박사논문을 정식 구입해 영구 컬렉션에 포함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사례다.
이번 성과는 한국에서 출발한 예술·학문적 연구가 서구의 공적 지식 체계 안에서 장기적으로 보존·연구·전시되는 가치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진준 교수의 논문은 조선시대 문인들이 마음속에 그리던 '의원(실제가 아닌 마음속에서 상상으로 가꾸는 정원)' 개념을 현대 디지털 기술로 재해석한 작품·연구다. 인공지능(AI)과 데이터가 넘쳐나는 시대에 기술을 넘어 인간의 감각과 기억을 어떻게 되살릴 수 있을지를 탐구한다.
특히 이 논문은 '데이터 가드닝(data gardening)'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이는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하는 대신 정원을 가꾸듯 천천히 다루고 경험하는 방식으로, 효율과 속도를 중시하는 디지털 환경에서 벗어나 인간의 감각과 사유를 회복하려는 새로운 접근이다.
길이 10미터에 달하는 한지 두루마리 형식 또한 이 논문의 중요한 특징이다. 독자는 논문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이동하게 되고, 동아시아 정원의 '거닐기'를 몸으로 경험하게 된다. 즉, 단순히 읽는 것을 넘어 움직이며 느끼고 사유하는 방식으로 설계됐다. 특히 이 논문은 총 9개의 한지 두루마리로 제작됐으며, 이 가운데 하나가 애쉬몰린 박물관에 정식 구입돼 영구 소장·전시될 예정이다..
이 논문은 2020년 옥스퍼드대학교 순수미술 철학박사(DPhil) 심사에서 만장일치로 '수정 없음(No Corrections)' 판정을 받으며 학문적 완결성을 인정받았다. 더구나 2년 반만에 마치고 얻은 성취로 900년 역사의 옥스퍼드에서도 극히 드문 사례로 당시에 주목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옥스퍼드대학교 박사논문은 보들리언 도서관(Bodleian Library)에 학술 자료로 등록되지만, 이번 사례는 이와 별개로 박물관이 학위 수여 이후 5년간의 독립적 심의를 거쳐 예술·학술적 가치를 인정하고 구입한 것이다. 생존 작가의 학위 논문이 세계 최고(最古) 대학 박물관의 영구 컬렉션에 포함된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애쉬몰린 박물관의 엘리스 킹 중국·한국 미술 담당 큐레이터인 셸라 베인커 옥스퍼드 교수는 “이 긴 사색적 두루마리는 재료와 기법, 그 안에 담긴 문화적·지적 지식의 폭과 깊이, 그리고 다양한 공간을 제시하는 복합적 구성에 이르기까지 여러 측면에서 새로운 지평을 연다”고 평가했다.

이진준 교수는 옥스퍼드에서 논문을 집필하던 당시 다리 부상으로 휠체어 생활을 하며 '움직임과 멈춤'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고 밝혔다. 그는 “AI 시대에도 예술은 비물질적 이미지에만 머물 수 없다. 디지털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감각과 경험은 오히려 약화될 수 있다”며 “데이터를 넘어 인간이 몸으로 경험하고 사유하는 새로운 감각 체계를 제안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서구 지성사의 대표적 박물관에 보관되면서 한국을 비롯한 동양적 사유가 AI 시대의 새로운 감각 체계를 잇는 하나의 기준점으로 지속적으로 읽히고 논의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KAIST에서 예술가로서는 처음으로 전임교수에 임용된 이진준 교수는 현재 옥스퍼드대학교 엑시터 칼리지 방문교수, 뉴욕대학교 겸임교수로 활동하며 예술·기술·인문학의 융합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케이팝 아티스트 지드래곤의 홍채 데이터 기반 우주 예술 프로젝트 'Good Morning, Mr.G-Dragon', 분당중앙공원 AI 기반 미디어 심포니 '시네 포레스트: 동화' 등 작업으로 국내외 예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김영준 기자 kyj85@et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