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의 넥스트 거버넌스] 〈9〉정권교체 인사논란 '한국판 플럼북'이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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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초빙석학교수·前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기업인 시절 비상임 이사로 활동 중에 기관장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일이 있었다. 이유인즉슨, 정권이 바뀌자 나가라는 압박을 받았음에도 버티다 감사원 감사가 시작되자 결국 직을 내려놓고 떠난 것이다. 또 한 번은 대통령 직속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던 중 자발적 사임을 권고 받았다. 이런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은 정권교체기마다 비일비재하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 '알박기'라며 퇴진을 압박하고, 야당은 '정치 보복'이라며 반발한다. 결국 표적 감사, 공개 압박, 때로는 형사 처벌까지 이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정권교체기마다 이 같은 현실은 국가 운영 전반에 적잖은 후유증을 남긴다. 첫째, 정책의 연속성이 훼손된다. 기관장이 거취 압박에 시달리면 중장기 사업은 표류하고 조직의 안정성은 무너진다. 긴 호흡으로 추진해야 할 과제들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리셋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둘째, 전문성이 축적되지 않는다. 300여개가 넘는 공공기관에 전문성을 갖춘 기관장이 필요하지만, 정치적 변수에 따라 자리가 흔들리면 유능한 인재가 기피하게 된다. 결국 해당 분야에 정통하기보다는 정치적 연줄에 능한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는 왜곡이 반복된다. 셋째, 법치주의가 훼손된다. 2007년 공공기관운영법이 임기제를 도입한 취지는 정권 변화와 무관하게 기관이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법에 명시된 임기가 사실상 무력화돼 왔다. 법이 있으나 마나 한 상황이 반복되면 법치국가라는 말이 무색해진다.

해법은 제도화에 있다. 미국의 이른바 '플럼북(Plum Book)'은 참고할 만하다. 대통령이 임면권을 가진 약 9000개 연방정부 직책의 임명 방식, 자격 요건, 임기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인사 지침서다. 플럼북의 핵심은 '구분의 명확성'이다. 대통령과 운명을 같이하는 정치적 임명직(Political Appointees)과 정권과 무관하게 신분이 보장되는 직업공무원(Career Civil Service)이 어떤 자리인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정치적 임명직은 대통령 임기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함께 물러나고, 직업공무원은 어느 당이 집권하든 전문성을 바탕으로 일관된 행정을 수행한다. 이 경계가 분명하니 '알박기'도, 무리한 '찍어내기'도 설 자리가 없다. 더 중요한 것은 투명성이다. 어떤 자리가 대통령 임명직인지, 어떤 자격이 필요한지, 현재 누가 앉아 있는지가 투명하게 공개된다. 전문성 없는 무자격자를 임명하려 해도 여론의 견제를 받는다. 반대로 플럼북에 없는 자리는 대통령이 함부로 손댈 수 없다는 선도 분명해진다.

우리나라도 '한국판 플럼북'을 만들어 대통령 임명 가능 직위를 명확히 규정하고 공개해야 한다. 현재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거나 영향력을 직간접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자리는 1만8000개에서 2만개에 이른다고 추산된다. 이 가운데 어떤 자리가 정치적 임명직이고, 어떤 자리가 전문가로 채워져야 하는지를 법과 제도로 명확히 할 때다. 또 독립성이 필요한 기관은 별도의 보호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감사원, 국가인권위원회, 방송통신위원회 등 정치적 중립성이 요구되는 기관의 경우, 임기 보장을 더욱 강화하되 전문성과 독립성에 대한 검증 절차를 엄격히 해야 한다.

한국은 1997년 이래 아시아에서 거의 유일하게 보수와 진보가 번갈아 집권하면서도 평화적으로 권력을 이양해 왔다. 이제 이 성숙한 민주주의에 걸맞은 공직 인사 시스템을 갖출 때가 됐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되풀이되는 인사 논란에 종지부를 찍고, 국민이 선택한 정부가 국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제도적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특정 정파의 이익이 아니라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품격을 높이는 일이다.

이영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초빙석학교수·前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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