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멀다 하고 수많은 혁신 제품이 쏟아진다. 빅데이터는 올드한 단어가 됐고 인공지능(AI)은 일상이 됐다. 누가 먼저 용어를 선점하느냐가 기업 브랜딩의 핵심 전략이 되고 있다. 기업은 연구할 시간도 없이 새로운 기술 용어의 뜻을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
스타트업에 혁신 기술은 양인지검(兩刃之劍)이다. 회사의 네임 밸류를 높여야 하는 경영진 입장에서 '우리 회사가 혁신 기술을 갖고 있다!'라고 외치는 순간 단숨에 이목을 끌 수 있다. 그러나 그 관심이 사그라들기 전 실무자들은 혁신을 증명해내야만 하는 대혼돈에 빠지곤 한다.
2015년 빅밸류 창업 초기 우리는 AI 기술을 활용한 부동산 시세 산정 기술이 혁신이라고 확신했다. 이 기술을 팔기 위해 다양한 산업군의 고객을 만났다. 그러나 1년 동안 고객들에게 AI, 기계학습, 통계학을 설명하는데 적지 않은 시간을 허비했다.
2016년 3월 구글 딥마인드의 알파고가 이세돌 9단과 대국을 펼쳤다. 대국 이후 AI가 연일 뉴스와 미디어를 장식했다. 또 누구나 AI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수많은 고객사에 AI팀이 생겨났고, 엄청난 전문가들이 대거 등장했으며 투자자들도 AI 기술을 보유한 스타트업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단기간에 발생한 폭발적 반응은 다양한 문제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투자 심사에서 만난 유명한 투자 전문가는 비감독학습이 아니면 딥러닝이 아니라며 강화학습이 아닌 AI는 모두 하위 기술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고객사 AI 전문가도 기술을 이해하지 못한 채 추상적인 요구사항만 내놓았다. 이러한 혼란이 정리되는데 3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고객이 AI라는 기술을 담백하게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요구사항은 구체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기존 산업의 가치사슬을 중심으로 AI 기술이 대체 가능한 요소들을 정확하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사례를 검토하고 복합적인 변수들을 동시에 고려하면서 수시로 판단이 필요한 업무들에 적극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했다. 금융권에서는 신용평가와 담보평가, 유통분야에서는 고객 맞춤형 추천시스템, 의료 분야에서는 AI 판독 등 빠르게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렇듯 고객들의 구체적인 요구사항 덕분에 스타트업들은 기술의 세분화와 구체화가 가능해졌다. 스타트업 내부에서도 한 달이면 사라질 기술 연구가 아니라 고객사에서 오랜 기간 사용할 단단한 기술에 자원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이 시기부터는 고객을 확보한 기업과 확보하지 못한 기업의 경험 차이는 엄청난 속도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스타트업 입장에서는 가장 원하는 시장이 열렸으나 실제 매출은 아직 만족할 수준이 되지 못하는 가장 위험한 시기이기도 하다. 수많은 고객은 아직 설익은 스타트업 기술을 다른 경쟁사와 공유하고 싶지 않아서 독점 계약을 요구하고, 타사와 계약된 스타트업과는 협의를 진행하지 않는 혼돈의 시기다. 스타트업 경영진은 고객 확보와 자금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두 가지 기술 연구를 동시에 진행하기도 한다. 새로운 신기술에 반응하는 투자자를 잡기 위해 무리한 기술 피봇을 진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시기는 무엇보다 기업의 부가가치에 집중해야 하는 때다.
혁신 기술을 핵심 역량으로 내세우는 스타트업은 시장의 변화를 전제로 한 사업 계획을 세운다. 기업의 가치사슬에 깊게 참여하는 신기술은 단기전이 아닌 장기전이다. 작동하는 기술을 시연하는 게 목적이 아니고 고객이 안심하고 함께 일할 기술을 제공해야 한다. 상호 이해와 신뢰가 쌓여야 고객과 시장이 변화하고 우리의 기술이 빛을 보기 시작한다.
스타트업에 혁신이란 초기에 출항을 위한 자원과 에너지를 제공하지만 긴 항해하는 동안 모든 선원이 하나의 목표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나침반이 돼야 한다. 수시로 바뀌는 방향타에는 아무리 노를 저어도 신대륙에 도달하기 어렵다.
구름 빅밸류 대표 kloud8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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