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AI유니콘 육성? 몸집 키울 먹거리도 부족
미국의 미디어 및 연극학 교수인 로널드 B. 토비아스는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 가지 플롯'에서 같은 목표를 놓고, 서로 갈등하며 경쟁하는 두 라이벌을 설정하는 방법을 소개한다. 대립하는 세력이 긴장을 창조하고 그것을 극복하며 싸워나가는 과정은 독자에게 큰 흥미를 준다. 상반되는 가치의 양립과 지속을 이끌어 내는 일은 인간 세상 숙명과도 같다.
최근 인공지능(AI) 산업 육성이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두고 치열한 어깨싸움을 벌이고 있다. '데이터 확보'와 '개인정보'라는 첨예한 이슈를 둘러싼 줄다리기가 팽팽하다. AI유니콘 기업은 전 세계에 67개 정도로 헤아려진다. 미국 35개, 중국 18개 기업으로 두 나라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 미국은 주로 운송, 교통 등 자율주행과 관련한 분야가 많고, 중국은 주로 안면인식 분야로 서로 다른 주력 분야를 타깃으로 한다. 국내서도 위메프, 토스, 야놀자 같은 기업이 있으나 글로벌 순위에 랭킹된 한국 AI유니콘 기업은 현재로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AI전쟁에서 한국의 현주소를 냉엄하게 보여주는 지표라 하겠다.
한국 AI 스타트업…몸집 키워 해외로 나가려면
'몰로코(MOLOCO)' 같은 기업은 특히 눈길을 끈다. 한국인이 창업한 AI 기반 광고솔루션 스타트업인 이 회사는 유망한 글로벌 유니콘 기업으로 주목받는다. 2013년 실리콘밸리에서 창립된 몰로코는 유튜브와 구글에서 일한 경험을 토대로 데이터 머신러닝에 기반한 광고모델을 연구한다. 이 사례는 한국 토종기업이 자생해 글로벌 시장에 진출했다기보다 처음부터 글로벌 고객사를 대상으로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태생하였기 때문에 출발점부터 다르다. 시험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한국에서 토익(TOEIC) 시장 수요자를 대상으로 국내에서 창업한 AI 솔루션 기업 '뤼이드(Riiid)'는 본사를 미국으로 이전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뤼이드의 해외법인 전환이 이뤄진다면 국내 기업에도 좋은 선례가 될 것이 분명하나 1조원에 달하는 유니콘이 시도하는 사례는 처음이고 세금 부담도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 AI기업은 어떤 기술력으로 시장을 형성하고 있을까. 국내 AI 스타트업 10대 기업을 살펴보면 의료 분야를 중심으로 데이터 사업을 확장하고, 그 밖에 머신비전, 번역, 클라우드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규모에 비해 질적인 측면은 다소 열악하다는 분석도 있다. 한국은 AI 분야에 있어 세계 특허인용지수(CPI)에서 상위 10%에 드는 비율이 약 8%에 불과하다. 특허가 인용된 숫자가 적다는 건 다른 곳으로 기술이전을 하는 기술력의 파급력이 떨어진다는 해석이 나온다. 한국의 AI 산업이 얼마나 질적으로 우수한 기술경쟁력을 가지고 글로벌 산업계를 리드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의 해답을 찾아야만 한다.
또 하나 유의할 점은 바로 해외 평가지표 의존도가 높은 국내 기술평가 척도다. 해외 기준에 기대다 보면 국내 현황과 특성을 반영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 해외 기술 평가지표는 주로 시장성과 브랜드 가치에 근거해 기술경쟁력을 평가하는 경향이 강한데 한국 기업의 경우 여러 비교 우위에 시장성에서 낮은 평가를 받는 구조적 불이익을 안게 된다. 국내 현황에 맞는 기술 수준 평가 자료를 만들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정책 수립이 이뤄져야 한다.
AI 인재, 데이터 확보도 '산 넘어 산'
지난 기고에서 필자는 AI 인재 양성을 위한 학계, 기업계의 담을 허물고 전공자 중심 채용에서 벗어나 재교육을 통한 인력 양성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기업 연대는 고사하고 AI개발자 인력도 부족하다는 게 현장의 목소리다. 독창적인 AI 원천기술을 확보하자면 연구실, 학과의 벽이 모두 허물어져야 한다. 그래야 서로 다른 사고(思考) 물길이 만나 합류하고 또 다른 힘찬 물결을 이룬다. 여러 번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은 미래형 융합산업 발전을 위한 첫걸음이다.
다음으로 AI 기업을 키우기 위해서는 데이터 확보와 데이터 품질 관리도 필수다. 2020년 이른바 '데이터 3법' 개정은 산업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법 취지와 달리 현장에서는 혼선과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여전히 높은 데이터 활용 장벽으로 인해 AI 관련 분야 기업이 사업 초기부터 좌절하는 사례도 많다.
신용정보법과 개인정보보호법 사이에서 불명확한 법리 해석의 구멍이 남아, 시장성 있는 데이터 확보를 통해 AI기술을 활용하고자 하는 사업자에는 불확실성과 리스크를 안긴다. 현장은 여전히 규제에 어려움을 겪고 있고 해결사는 없는 상황에서 정책 입안자들이 현실은 제대로 알고 있을지 의문이다. 가명정보와 처리기관 지정을 통해 해결하거나, 민감 개인 정보 활용사업을 사전 진단해 적극적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도 방법이다.
반면에 중국은 공공 주도의 대규모 투자를 기반으로 미국을 맹추격하는 모양새다. 아무런 통제를 받지 않는 광범위한 개인정보 수집시스템은 중국 특유의 빅데이터 산업 생태계 조성의 견인차 노릇을 하고 있다. 우스갯말로 14억명의 막대한 인구 빅데이터가 중국이 AI 분야에서 빠르게 성장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 무기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일부 스타트업은 개인정보 침해를 기술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프라이버시 침해를 기술적으로 해결하는 대안을 강구하고 있다. 단말기 내 학습을 통해 알고리즘을 향상시켜 그 결과를 클라우드로 전송하면 각 단말기의 학습 결과와 연합해 전체 알고리즘 성능을 개선하는 연합학습(Federated Leraning) 기술이 주목받는다. 알고리즘을 내려받아 추론 및 실행이 단말기 내에서만 이뤄져 외부로 개인 데이터가 유출되지 않는 방식인 온디바이스 AI(On-Device AI) 등 기술을 사용하기도 한다. 또 유사한 방식으로 각 주체가 데이터를 소유하되 AI를 공유해 AI 개발 비용을 줄이고 공유되는 AI 성능을 높이는 모델이 제시되고 있다.
투자은행의 중요성과 도입 과제
자금지원 정책은 또 어떠한가. 우리나라는 벤처기업의 초기 신규 자금 조달을 주로 정부 지원에 기댄다. 스타트업 육성을 위한 액션 플랜의 하나로 단순한 담보 형식 지원이 아닌 투자 개념의 민간 은행을 통한 지원도 진지하게 검토해볼 문제다. 이른바 '죽음의 계곡(Death Valley)'을 수월하게 넘어가기 위해서는 중기 이후의 몸집을 키우는 스케일업 단계에서 대규모 자금과 후속투자가 필요하다.
벤처 탄생부터 후기까지 생애주기를 아우르는 안정적 스케일업을 위해서는 실리콘밸리 은행그룹(SVB) 모델을 주목할 만하다. SVB그룹 모델은 민간의 모험 자본이 동반자적 성격으로 벤처기업에 직간접적으로 흘러 들어가게 하는 구조로 선순환 생태계를 만들어낸다. 즉, 벤처기업 초기에는 은행이 엔젤이나 캐피털에 대출을 주고 투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기업에 돈이 흘러올 수 있게 하고, 중기 이후에 후속투자를 받기 전에는 스케일업을 지원하기 위해 은행이 직접 기업에 벤처 대출을 준다. 이때 벤처 대출 자금은 이미 성공한 벤처기업 예적금과 부외펀드 등으로 조달한다는 특징도 있다. 이처럼 SVB그룹이 가진 은행, 증권, 캐피털, 프라이빗 네 가지 계열사는 초기, 중기, 후기에 이르는 단계별로 맞춤형 자금공급 전략을 펼친다. 국내에서는 대개 기존 대출 한도나, 신용등급, 담보대출 등으로 은행 문턱에서 자금 조달에 좌절하는 사례가 여전히 많다는 것을 고려할 때 새로운 모델이 될 수 있다.
스타트업 생태계도 국가지자체 주도의 핀셋 지원 필요해
국내기업이 해외와 연계해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으로 국내에서는 과기부, 중기부,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는 물론 지자체까지 나서고 있다. 앞서 언급한 '뤼이드'가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 과기정통부의 본투글로벌센터 해외지원사업은 해외 진출이 준비된 ICT 혁신기술(데이터, 네트워크, AI, 5G 등) 기업을 선발하고 컨설팅이나 현지 기업 매칭, 공간 제공 등을 지원한다. 그 외에도 최근 중기부가 발표한 '초격차 스타트업 1000프로젝트'나 KOTRA의 '글로벌점프300 프로그램'에도 AI 분야가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다.
자발적 지원과 성장을 기다리기보다 국가에서 될성부를 만한 스타트업을 콕 찍어 선발하고 지원하는 방법도 있다. 룩셈부르크에서 추진하는 민관협업 스타트업 지원 프로그램 핏포스타트(Fit 4 Start)는 잠재력이 높은 스타트업을 대상으로 대폭적인 재정 지원과 멘토링을 제공한다. 법인세를 면제하거나 최소 1유로 자본금과 직원 1명만 있어도 사업자 등록이 가능한 초간편 설립 절차를 갖춘 이 도시에는 공무원들도 4차 산업혁명 분야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고 한다. 투자 유치를 위해선 룩셈부르크 장관들도 직접 한국을 찾을 정도라 하니 정부 주도의 4차 산업혁명 강력 드라이브는 세계적 현상인 듯하다.
비슷한 사례로 지난 4월 서울시는 여의도, 마곡, 양재 등에 핵심 해외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KOTRA와 손을 잡았다. AI 등을 포함한 '서울시 5대 핵심사업'에 대한 글로벌 투자유치를 위해 지자체와 공공기관이 지원 사격에 나선 것이다. 흥미롭게도 KOTRA 해외 무역관에 서울시 직원을 파견해 지역 네트워크를 조사, 발굴하고 협업을 추진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이제 책상에 앉아 기업을 지원하는 시대는 막을 내렸다는 신호다.
하루는 AI 로봇이 인간을 만드는 시합을 하자고 신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러자 신은 웃으면서 어디 한번 해보라고 도전을 승낙한다. AI 로봇은 신이 인간을 만들 때처럼 흙을 모아 반죽을 하려 하지만 그때 신이 말한다. “잠깐, 내가 만든 흙에 손대지 마. 흙도 네가 만들어.”
우리에겐 AI 기술력은 있으나 쓸 만한 데이터는 부족하다는 현장의 목소리가 빗발친다. 특히 개인정보 '보호'와 '활용'은 함께 가야 하기에 우리나라의 '데이터 3법'의 2.0 버전이 절실한 시점이다. 합법적인 데이터 확보는 AI 산업의 글로벌 주도권 확보를 위한 선제적 과제며, 국가의 기술 주권은 제도적인 뒷받침에서 나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글로벌 AI 유니콘 기업 찾기 전에, 말의 몸집을 키울 비옥한 사료가 나올 환경부터 국가가 나서서 조성하자.
임성은 서울기술연구원장 ych5534@sit.re.kr
<필자 소개>
임성은 원장은 서울시립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행정고시 출제·선정 위원, 서울특별시 연구실장 등을 역임했다. 서경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국책연구원 평가위원를 거쳐 현재 서울기술연구원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