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3월 하순.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이 김완희 박사에게 전문을 보냈다. 공업 진흥을 지원하는 대통령 자문역(諮問役)을 맡아 달라는 내용이었다. 김 박사는 박정희 대통령의 뜻을 거절할 수 없었다. 대학 강의를 다른 교수에게 맡기고 4월 초 일시 귀국했다. 김 박사는 귀국 이튿날 오전 9시30분부터 2시간여 동안 박 대통령을 대통령 집무실에서 독대하고 전자공업 진흥 방안 관련 대화를 하고, 오후에는 박 대통령의 부평 산업공단 시찰에 동행했다.

공단에 도착해서 현황 브리핑이 끝나자 책임자가 박 대통령에게 건의사항을 말했다. “각하, 수많은 기업이 입주해 있지만 이곳에는 전화기가 한 대도 없습니다.” 최빈국 한국의 당시 현실이었다. 박 대통령은 체신부 장관에게 지시해 전화 시설을 설치하도록 조치했다.

같은 해 7월 1일. 상공부 장관이 미국에 있는 김완희 박사에게 또 초청장을 보냈다. 김 박사는 7월 25일 귀국해 박 대통령을 만났다. 김 박사는 박 대통령 지시로 8월 4일 오전 8시30분 경제기획원에서 열린 '경제동향 보고회'에 참석했다. 김 박사는 이어 3주간 상공부가 주관하는 전자공업육성정책회의, 상공회의소 최고경영자회의, 국회 상공분과위원회에 참석해 외국 전자산업 동향과 흐름에 관해 소개했다.

김 박사는 이병철 삼성전자 사장 초청으로 삼성전자 중역회의에 참석해 전자공업을 소개했다. 인켈 창업주인 조동식 사장과 김정식 대덕산업 사장, 윤봉수 남성 사장, 구인회 금성사 사장, 김우중 대우실업 사장, 조중훈 대한항공 사장, 김향수 아남산업 사장 등도 만났다.

1973년 5월 30일. 휴가 중 귀국한 김 박사는 이날 오후 청와대 비서실로부터 연락을 받고 청와대로 들어갔다. 박 대통령은 집무실에서 혼자 김 박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 대통령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김 박사, 나올 때가 되지 않았소?” 박 대통령이 귀국을 권했다. 김 박사는 대통령 자문역에 이어 상공부·체신부·과학기술처 장관 고문직을 맡았다. 김 박사의 활동 범위가 넓어지자 그의 거취와 관련한 이런 저런 말들이 나돌았다. 1971년에는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이 김 박사에게 한국과학기술연구소장직을 제안했고, 몇 년 후 오원철 대통령 경제2수석비서관이 한국과학원(현 KAIST) 원장직을 맡으라는 말도 했다. 김 박사는 이런 제안을 거절했다. 관가 주변에서는 김 박사의 입각설까지 나돌았다.

이를 본 윌리엄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미국 대사는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지 말고 민간인 신분으로 한국 전자공업 발전에 기여하는 방안을 찾아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라고 조언했다. 박충훈 전 상공부 장관은 입각(入閣)을 권했다. “청와대 특별 자문역으로 일하는 것도 좋지만 그건 비서에 지나지 않습니다. 장관은 다릅니다. 이왕이면 입각하세요.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1976년 1월 7일. 겨울 휴가를 받아 귀국해서 서울역 앞 도큐호텔에 묵고 있는 김완희 박사를 박 대통령이 청와대로 불렀다. “김 박사, 이제는 나올 때가 되지 않았소. 나와 함께 일 좀 합시다.” 김 박사는 박 대통령의 삼고초려를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김 박사는 부와 명예를 버리고 귀국하기로 결심했다. “각하, 귀국해서 보필하겠습니다.” 이 말에 박 대통령은 환한 웃음을 지었다. 김 박사가 본 박 대통령의 미소 중 가장 밝은 미소였다. 이날 박 대통령은 현관까지 나와 김 박사를 배웅했다.

김 박사는 1977년 5월부터 1978년 8월까지 대학에서 안식년 휴가를 받아 귀국했다. 같은 해 10월 17일 한국통신기술연구소(현 ETRI), 전기기계연구소(현 한국전기전자시험연구소) 등의 상임 고문직을 맡았다. 대학 총장과 일반 기업체 등에서 자리를 제안받았으나 모두 거절했다. 1978년 11월 13일. 김 박사는 이날 오후 2시 청와대에서 오원철 청와대 경제2수석을 만났다. 오 수석은 김 박사에게 한국전자공업진흥회(현 한국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 회장직을 제안했다. 가족들은 극구 반대했다. 미국 대학 동료 교수들도 만류했다. 이낙선 전 건설부 장관도 회장 취임에 반대했다. “김 박사님, 진흥회는 업계를 대표하는 기관입니다. 그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왕이면 더 큰 일을 맡아야 합니다.”

김 박사는 오 수석의 제안이 박 대통령 뜻이라고 생각했다. 김 박사는 2년만 회장직을 수행하고 미국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그의 마음은 여전히 대학 강단에 서 있었다. 1978년 12월 5일 오후 2시. 김 박사는 이날 한국전자공업진흥회 상근 회장과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 상근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전자업계 대표들은 두 손을 들어 환영했다. 김 박사는 회장 취임 후 전자공업 국내 시장 확대와 수출 증대, 최신 기술 도입, 해외 시장 개척에 주력했다. 첫 번째로 현안인 가전제품 특별소비세를 15%로 인하했다. 정부는 당시 가전제품을 사치품으로 분류하고 TV의 경우 소비세를 35%나 부과했다.

김 박사는 이어 존 위컴 당시 주한 미군 사령관을 만나 미군 PX에서 한국 전자제품을 팔 수 있도록 요구, 이를 관철했다. 이 조치로 삼성전자 컬러TV와 인켈 오디오 등 국산 가전제품을 미군 PX에서 판매했다. 김 박사는 전자업계 숙원인 컬러TV 방송과 국내 시판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을 만날 때마다 허용을 건의했다. “컬러TV는 흑백TV보다 부품이 3배나 많이 들어갑니다. 컬러TV를 판매하면 국내 전자산업이 크게 성장할 것입니다. 이미 세상은 컬러TV 시대에 돌입했습니다.” 박 대통령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김 박사, 내가 가장 듣기 싫어 하는 말이 '정부가 잘사는 사람만 위하고 가난한 사람은 거들떠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흑백TV도 못 보는 사람이 많은 데 비싼 컬러TV가 나오면 없는 집안 사람들은 더욱 비참한 생각을 하게 될 것이 아니겠소?”

청와대는 김 박사에게 한국정밀기기센터와 국제중재위원 일도 맡겼다. 그 무렵 김 박사가 맡은 직책은 무려 17개나 됐다. 해외 시장 개척을 위해 1980년 6월 25일부터 7월 10일까지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5개국을 순회하며 35개 중소기업 제품을 소개했다. 1979년 9월 25일부터 10월 4일까지 한국을 비롯한 11개국 257개 업체가 참가한 가운데 서울 강남구 삼성동 한국종합전시장에서 한국전자전람회를 개최했다. 전시회는 국내 전자업계 최대 행사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25일 오전 11시 전자전 개막식에 참석해서 개막 테이프를 끊고 김 박사의 안내로 전시장을 돌아보고 참석자를 격려했다.

1979년 10월 26일. 김 박사는 컬러TV 시판 건의와 전자전 참석에 감사하는 편지를 청와대 총무비서관에게 맡기고 경북 구미로 향했다. 이튿날 새벽 충남 도고호텔 숙소에서 김 박사는 박 대통령 서거 소식을 들었다.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 김 박사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다. 만남은 길었지만 이별은 한순간이었다. 박 대통령 서거는 김 박사의 삶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제5공화국이 출범하자 김 박사는 1980년 12월 11일 진흥회장직에서 물러났다.

김 박사는 1982년 4월 전자신문(당시 전자시보) 등록 신청서를 문공부에 제출했다. 그해 6월 30일 등록허가증을 받아 9월 22일 창간호를 발행했다. 전자신문은 한국 최초로 영문판을 발행하고 한국 전자산업을 해외에 소개했다. 지면 특화와 차별화로 '신문들도 보는 신문'으로 불리며 한국 정보화시대를 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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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이 1968년 8월(위쪽)과 1970년 9월 재미 과학자 김완희 박사에게 보낸 편지. <국가기록원 제공>>

김 박사는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1986년 12월 17일 미국으로 돌아갔다. 2009년 6월 3일 한국을 방문해 박정희 대통령과 주고받은 친필 편지 130여통 중 103통을 국가기록원에 기증했다. 1967년부터 1979년까지 13년간 박 대통령과 주고받은 현대판 '어찰(御札)'에는 과학기술 강국과 전자공업 진흥을 위한 두 사람의 고민과 열정이 담겨 있다. 미국에서 '기술중개'를 비롯한 기술평가회사를 운영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하던 김 박사는 2011년 5월 24일 뉴욕에서 별세했다. 향년 85세.

이명박 대통령은 5월 27일 김 박사의 유족에게 조전(弔電)을 보내 애도를 표했다. 이 대통령은 조전에서 “대한민국 과학기술 발전과 전자산업의 초석을 다지고 산업계 최초의 전문지인 전자신문을 창간한 박사님의 열정과 업적은 대한민국 국민의 가슴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추모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