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貞洞)길엔 아직 남아있어요!
정동(貞洞)길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정동길은 모든 사람들에게 꿈을 주었던 동네다. 개화기 1880년대 정동은 외국 문물이 들어오는 관문이었다. 양화진을 통해 돈의문으로 외교관들이 들어와 공사관을 지었다. 마포나루에서 소의문을 통해 감리교 선교사들은 교육시설과 의료시설을 만들었다. 아펜젤러는 정동 34번지에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배재학당’을 세웠고, 스크랜턴은 최초의 여학교인 ‘이화학당’을 세웠다. 두 학교 사이에 예배당을 지으니 바로 최초의 근대식 교회 ‘정동제일교회’다.
을미왜란으로 명성왕후를 잃은 고종은 경복궁에서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옮긴다. 1년 7일간 러시아 공사관(俄館)에서 머물며 한반도의 미래를 꿈꾼 후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황제의 나라 경운궁은 황궁이 되고, 경운궁 궁담길에 열강들의 공사관들이 즐비하게 늘어선다. 미국 공사관, 독일 공사관, 러시아 공사관, 영국 공사관, 프랑스 공사관, 벨기에 공사관과 이탈리아 공사관까지 공사관들이 들어선다. 공사관과 영사관이 있는 정동은 밤이 되면 외교의 거리, 사교의 거리로 개화기에 요즘 말로 ‘핫 플레이스’였다.
정동은 왜 정동(貞洞)일까? 600여 년 전 태조 이성계의 꿈과 사랑이 이곳에 숨겨져 있다. 조선 최초의 왕후이자, 조선 최초 세자 방석의 어머니인 신덕왕후 강(康)씨의 능이 있던 공간이다. 신덕왕후 강씨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태조 이성계는 경복궁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능을 만든다.
도성 안에 묘를 쓸 수 없는 능법이 있었지만 애틋함을 간직하고자 능을 이곳에 조성한다.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 정릉(貞陵)이다. 정릉과 원찰 흥천사는 언덕이 있는 러시아 공사관 터와 경기여고 터를 지나 덕수초등학교까지 1만여 평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태조 승하 후 태종 이방원은 정릉을 파헤치고, 정릉의 석물들을 청계천 광통교 건축에 사용해 버렸다.
정릉은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겨졌으나 정릉에 얽힌 이야기는 중구 정동에 남아있다. 정동은 역사와 문화가 가득한 동네다.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와 고종의 대한제국 이야기 그리고 개항기 세계열강들이 경운궁 궁담길 근처에서 시간을 쌓았다. 환구단에서 대한문까지 경운궁 석조전에서 중명전 지나 돈의문 터까지 정동은 젊은 청년과 남녀 학생들까지 교육을 받고 꿈을 키웠던 거리다.
시청역 1번 출구에서 나오면 경운궁 대한문이 눈에 들어온다. 서울의 중심에 자리 잡은 정동, 빌딩과 빌딩 숲 사이에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정동길 옆 궁담길 따라 걸으며 다시 한 번 꿈을 꾸어보자. 그리고 여유가 되면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를 읊조리며 추억 속으로 들어가 보자. 추억이 넘치는 동네 ‘정동(貞洞)’엔 아직 당신의 꿈이 오롯이 살아있다.
필자소개/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양도성 성곽길 시간여행’ 저자
-‘한양도성에 얽힌 인문학’ 강연 전문가
-한국생산성본부 지도교수
-(사)서울아리랑보존회 이사
-남서울예술실용학교 초빙교수
-‘한양도성 옛길’ 칼럼니스트
-‘최철호의 길 위에서 걷다’칼럼니스트
-‘우리동네 유래를 찾아서..’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