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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현 한국생산기술연구원 한러혁신센터소장>

냉전이 한창인 1961년, 구소련 우주선 보스토크를 탄 유리가가린이 우주비행을 마치고 무사히 지구에 귀환했다. 경쟁자였던 미국에겐 충격이었다. 당시 기술로는 지구 진입 시 발생하는 엄청난 열과 압력으로부터 우주비행사를 지킬 방법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구소련 과학자들은 본선으로부터 착륙용 원형 캡슐을 분리하는 혁신적 아이디어를 활용해 인류 최초 우주비행에 성공했다.

이후 냉전시대와 소련붕괴 후 개방을 거치면서 러시아 기술은 혁신 주역과는 다소 멀게만 느껴졌다. 오히려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은 근대 가장 성공적인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하지만 기초기술 없이는 세계 일류가 될 수 없다는 한계도 내포하고 있었다. 1990년대 한국은 러시아에게 경제차관을 빌려주고 그 대가로 군수장비를 도입했다. 러시아제 탱크를 조종하던 병사들은 덥고 답답해야 할 내부가 에어컨을 튼 듯 쾌적한 것에 놀랐다. 탱크에는 펠티어 소자(전기로 냉각효과가 발생하는 열전소자)를 활용한 러시아의 무소음 냉각기술이 적용돼 있었다. 국내 대기업이 먼저 이 군수기술을 상용화했다. 집집마다 하나씩은 다 있는 김치냉장고가 그 히트상품이다. 2010년대 초까지 한국의 대기업은 너나 없이 러시아 기술을 결합해 휴대폰, 가전, 자동차, 항공 분야 신제품을 개발했다. 하지만 대기업과 달리 기술력과 자본이 부족한 중소기업에게 한-러 기술협력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었다. 설령 러시아와 기술개발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현지화라는 큰 벽을 넘지 못하고 사업화를 중단하는 일도 발생했다.

2018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한-러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은 한-러 혁신 플랫폼 구축을 선포했다. 중소·벤처기업의 기술 사업화 및 글로벌 시장 진출을 위한 양국 유관기관 간 혁신 플랫폼 구축이 그 골자였다. 다음해 혁신 플랫폼 활성화를 위해 한국생산기술연구원 내 한러혁신센터가 개소했다. 그동안 대기업 위주로 이뤄지던 한-러 기술협력을 혁신성장의 동력인 양국 중소기업으로 확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한러혁신센터는 중소기업의 실질적인 기술협력 및 지원에 중점을 뒀다. 러시아의 기관 및 기업과 국내 중소기업을 잇는 수요조사와 기술협력 사업을 병행했다. 기업의 수요 기술을 파악한 후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연구진을 통해 기술애로를 해결하는 역할 또한 수행했다.

성과 역시 남달랐다. 지원기업인 엠투웬티는 러시아 우주인 근육 감소를 예방하는 항공우주 기술인 EMS를 활용해 신제품 헬스케어 장비를 개발했다. 고령 인구 등의 근감소 유틸리티 제품을 통해 약 8억원의 국내 매출 및 미국·일본 등 해외 수출계약에도 성공했다. 국내 우수한 상용화 기술이 러시아 기업에 활용된 사례도 있다. 한우공영은 기술사업을 통해 개발된 머플러 제조관련 혁신제품을 수요기업인 러시아 자동차 제조기업에 판매해 66만달러 수출실적을 달성했다. 양국 중소기업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수요조사를 통해 파악하고, 맞춤형 기술개발을 한 결과였다.

한-러 혁신 플랫폼은 다부처(과학기술정보통신부·산업통상자원부·중소벤처기업부) 관계기관 협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을 통해 개발된 기술협력 성과는 창업진흥원과 중소기업기술정보진흥원을 통해 상용화 지원을 받게 된다. 다음으로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를 통해 시장진출까지 이뤄지는 원스톱 지원체계로 구성돼 있다. 혁신 플랫폼이라는 이름 그대로 기술과 사람이 서로 교류하는 혁신의 장을 함께 만드는 중이다.

최초의 우주선 보스토크는 '동방'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최초 인공위성인 스프트니크는 '동반자'라는 의미다. 동방의 협력 파트너, 한국과 러시아는 지금까지 과학기술협력을 중심으로 다양한 결실을 맺었다. 앞으로도 한러 혁신 플랫폼을 기반으로 양국 중소기업간 기술협력과 혁신성장이 계속 이어지길 기대한다.

김규현 한국생산기술연구원 한러혁신센터소장 khkim1308@kitech.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