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퀘이커 교도이자 평화주의자인 루이스 프라이 리처드슨은 1차 세계대전에서 총을 들고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구급차 운전병으로 자원했다. 리처드슨은 늘 날씨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전쟁의 최전선까지 미완성 원고를 들고 가서 구급차를 운행하는 사이에도, 참호 속에서도 틈틈이 날씨를 연구했다. 1922년 마침내 리처드슨은 오늘날 '수치예보'라고 불리는 방법을 고안하고, 연구 결과를 정리한 '수치계산에 의한 날씨 예측'을 발표했다. 6만4000명의 일꾼들을 구형 극장에 모은 후 동시에 손계산을 하게 하면 6시간 후 날씨 예측이 가능하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날씨도 행성 위치처럼 쉽게 예측 가능하리라고 믿은 리처드슨의 시도는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사람들의 손계산으로 6시간 후 날씨 예측에 몇 개월이 걸릴지 알 수도 없었다. 컴퓨터가 없는 시대를 산 리처드슨은 1922년 그의 저서에 “언젠가는 날씨 진행보다 더 빠른 계산이 가능해질 것이다”라며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1960년대 후반에 등장한 카오스 이론은 리처드슨이 확신한 수치계산 방법이 날씨 예측에 실패한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기상 현상이나 주식시장은 수많은 요소가 복잡한 상관관계 속에서 긴밀하게 얽혀 있고, 역동적이다. 카오스 이론에 따르면 수많은 변수가 섞여 있는 복잡한 세상에서는 작은 초기 조건의 차이로도 전혀 다른 미래가 펼쳐질 수 있다.
만약 주식시장에서 어느 종목을 하나 샀다고 가정하자. 주변 사람들도 그 종목을 사겠다고 하고 시장도 분명 상승세였는데 며칠 뒤 보니 크게 떨어졌다. 왜 그럴까. 모든 초기 조건과 주식시세 관련 변수 간 상호작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식시장 참여자들과 국내외 여러 변수를 모두 파악해서 분석하기는 쉽지 않다. 날씨 예측도 마찬가지로 초기 조건을 완벽하게 분석하는 것은 현실에서 불가능하다. '나비 효과'로 알려진 카오스 이론이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에 의해 탄생한 것은 날씨의 복잡성 때문이다. 다만 주가 예측모델은 주가 관련 빅데이터에서 상관성을 추출해 일반화하는 경험된 귀납법으로 만들어지는 반면에 날씨 예측모델은 자연계를 기술하는 예측방정식을 수치로 계산해서 미래 날씨를 예측하는 연역법으로 만들어진다는 큰 차이점이 있다.
기상청은 올해 4월 우리 기술로 개발한 한국형수치예보모델(KIM)을 운영하면서 세계 아홉 번째로 '리처드슨의 꿈'을 실현한 기상선진국(G-9)에 진입했다.
선진국에서도 보통 15~20년 가까이 자체 수치예보모델을 개발하고 지속 개선하고 있는 상황과 비교한다면 KIM은 다소 짧은 시간 안에 성과를 이룬 셈이다. 수치예보모델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초고속으로 계산할 수 있는 슈퍼컴퓨터, 정교한 수치 해석이 가능한 수치예보모델, 기상위성을 비롯한 첨단 기상관측망, 전 세계 관측자료를 실시간 수집할 수 있는 정보통신기술(ICT) 등을 모두 갖춰야 하기 때문에 수치예보모델은 국가별 기상기술력의 상징이기도 하다.
KIM은 우리나라의 대표 성씨를 연상시키듯 우리 고유의 수치예보모델로,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수정 보완이 가능하다. 이와 함께 한반도 기상 특성에 맞도록 완성도를 높여 가고 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기상청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KIM은 지금 이 시간에도 최일선에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세계가 인정하는'K-예보'를 위한 도전, KIM과 함께라면 꼭 성공하리라 믿는다.
박광석 기상청장 kmanews@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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