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8년에 자유한국당은 지방선거에서 유례없는 참패를 당했다. 분단 상황의 '반공 이데올로기' 특수로 줄곧 여당의 자리를 지켜 온 보수당은 궤멸 직전까지 갔다.
당시 우리나라 보수 정치의 미래는 암담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은 아직 생생했고, 선거 패배 이후 보수 진영의 자중지란도 계속됐다. 반공의 외침이 공허한 가운데 내세울 이념 지표가 사라진 보수 정당 정치인들은 초조했다. 보수 진영 전체가 정치성 만학(晩學)으로 바빠졌다. 그제야 먼지 쌓인 이념인 공화주의, 보수주의, 자유주의 등이 책장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념의 부재로 시름하던 보수 진영에서 이념의 선명성을 두고 경쟁하기 시작한 것이다. 보수 정당은 '처절한 쇄신과 혁신' 대신 '이데올로기'라는 틀 안에 자신들을 적당하게 구겨 넣었다. 그리고 누가 훌륭한 이념의 추종자인지를 겨루면서 '보수' '자유' '우파'라는 말을 사용했다. 자극이 더 강해진 형태로 반복됐다. 이러한 현상은 2020년 21대 국회의원 총선거까지 이어졌다.
저 멀리 바다를 건너온 오래된 이념이 현재를 사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호소력이 있을 리 없었다. 보수 정당은 민생과 동떨어진 정치성 구호를 외치는 집단이 됐다. 결국 2020년 총선에서도 참패했다.
이념은 시대와 장소라는 씨줄, 날줄로 완성된다. 살아 있는 이념은 늘 변용되고 발전한다. 시대정신에 맞는 이념은 정당을 살리지만 그렇지 못한 이념은 정당을 죽이기도 한다. 이것이 정치가 예민하게 세상의 변화를 읽어 내고 시대의 급소를 잡아 내야 하는 이유다.
지금 우리나라 보수 진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념 논쟁은 다분히 과거 지향 성격이 짙다. 프랑스 혁명기에 나온 보수주의 이념, 냉전 시기의 자유주의 이념, 로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공화주의 이념이 2020년 지금 대한민국 사회에 적합할 리 만무하다. 여전히 보수 진영은 이념의 충실한 수용자로서 기능에 빠져 시대정신을 찾아내려는 노력은 게을리하는 듯 보인다.
한편 영국 보수당은 300여년이라는 오랜 기간 정치 부침 속에서도 집권에 성공해 왔다. 시대가 변화하면서 그들이 지키고자 한 이념 원칙이나 순수성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해 참패하기도, 정책 노선을 급선회하면서 많은 사람이 지지를 철회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영국 보수당은 끊임없이 시대정신을 찾아냈다. 선거 승리를 위해 유권자 요구에 철저히 자신을 맞췄고, 위기를 빠르게 극복해 나갔다. 집권이라는 대의 앞에서 실용성과 유연성을 내세웠다. 경제 불평등이 심해지던 대한민국 사회에서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가 '경제민주화'라는 기치로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 집권에 성공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요즘 제1야당인 국민의힘을 향한 보수 진영 내부의 비판이 거세다. 주요 골자는 기존 우파의 이념을 버렸다는 것과 정체성이 모호하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돌이켜볼 때 지난 몇 년 동안 우리나라 보수 정당이 목청 높여 내세우던 이념은 국민의 마음을 흔들지 못했다. 메시지 전달 방식 문제도 있겠지만 보수 정당이 국민에게 제시한 이념 자체가 낡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보수 진영은 국민의힘이 얼마나 우파 이념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지가 아니라 '시대정신'을 얼마나 잘 읽고 있으며 얼마나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지에 대해 회초리를 들어야 한다. 예민하고 민첩하게 시대 변화를 따라가는 정당만이 존재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김재섭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회 위원 jaesubkim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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