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민 교수의 펀한 기술경영]<195> 지평을 가로질러

Photo Image

융합(融合). 우리말 사전은 '다른 종류의 것을 한 가지 상태로 결합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실상 언어마다 어감은 조금씩 다르다. 독일어 페르슈멜충(verschmelzung)은 원래 '녹는 것'이란 뜻이다. 두 가지 결합보다는 녹아서 하나가 된다는 느낌이다.

철학자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가 말한 지평융합도 이런 의미다. 우리는 뭔가를 이해하는 방식, 즉 나름의 지평이 있다. 이것은 새로운 지평을 만나 수용할 때 변하고 확장된다. 두 지평이 융해돼 만들어진 처음과는 다른 어떤 것을 말하는 셈이다.

융합만큼 요즘 흔한 용어도 드물다. 이것 없는 신기술은 싱거워 보인다. 그러나 별반 실제는 없다. 그러다보니 현대 기업의 흔한 '수사 표현'이 됐다. 과연 그럴까. 혹 이것이 새 지평을 열 뭔가는 아닐까.

프랑스 인시아드(INSEAD) 경영대학원 김위찬 교수와 러네이 모본 교수에게는 작은 단서가 있다. 두 교수는 '가로지르기'라고 표현한다.

첫 번째 방법은 빈 것을 채우는 데 있다. 화단을 꾸며 보자. 화분과 모종 구입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가야 할 길이 멀다. 전문가에 맡기면 비용은 몇 배나 든다. 홈디포는 내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팔기로 했다. 전직 목수를 직원으로 고용했다. 트럭 가득 목재를 팔지만 정작 판 것은 지식이었다.

Photo Image

두 번째 방식은 고객을 다시 보는 데서 왔다. 텔레레이트는 한때 금융데이터 강자였다. 주식시장 정보를 묶어 증권사 전산실에 넘겼다. 전산실은 이것을 터미널에 넣고, 투자담당자는 다운로드 받아 밤새 분석하곤 했다. 이게 증권사의 일상이었다. 블룸버그는 전산실 대신 투자담당자에게 초점을 맞췄다. 데이터 대신 '분석'이란 걸 팔기로 했다. 키보드 한 번이면 몇 시간 걸릴 정보가 튀어나왔다. 블룸버그는 시장을 고스란히 넘겨받았다.

세 번째는 기능-감성 전환이란 방법이다. 모든 제품은 기능 중심이나 감성 중심 가운데 하나이다. 이렇게 한쪽만 생각하다 보면 어느덧 다른 하나는 망각한다. 한때 커피는 기능제품 전형이었다. 깡통에 든 간 원두를 의미했다. 고가·중가·저가품은 있지만 거기서 거기다. 가격 경쟁이 중요했다. 스타벅스는 이것을 만남·여유·대화·창조란 감성으로 다시 포장했다. 전형 감성 제품인 화장품에 기능이란 역제안을 한 보디숍도 한번 뒤집어 새 시장을 만들었다.

네 번째는 불편함에서 찾는 데서 온다. 회계 소프트웨어(SW)를 생각해 보자. 정확하지만 편리하진 않다. 한참 배우고 나서야 가치가 나온다. 그래서 대부분 계산기에 만족한다. 관건은 편리함에 있다. '계산기나 연필만큼 편리하게'가 어느 회계 SW 대박의 관건이 됐다.

종종 어떤 생각의 정수를 알려면 시간을 거슬러 가야 한다. 블루오션 전략은 미끈히 다듬은 인조물 같다. 이 두 학자의 직관은 원석을 봐야 드러나 보인다. 오래전 두 학자는 '가로질러'라는 정수를 찾았다. 실상 블루오션도 그 가운데 하나의 파생품이다.

종종 혁신은 숨은 공간과 차원을 찾는 작업이라고 나는 조언한다. 열쇠가 필요할 때가 있고, 종종 키 위에 놓고 쭉정이를 날려 보낸 후에야 알갱이를 골라낼 수 있다.

가로지르기의 다른 이름은 관통이자 융합이다. 혁신에는 이 방법으로 찾아낼 수 있는 숨은 공간이 많다.

박재민 건국대 기술경영학과 교수 jpark@konkuk.ac.kr


브랜드 뉴스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