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어디서나 즉시 대답할 수 있는 세상이다. 이 말은 언제나 어디서나 즉시 대답해야만 하는 세상이라는 의미다.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시대보다 노동량은 줄었는데 일의 피로도는 높아졌다. 기계화·자동화가 신체 노동은 없앴지만 정보화·디지털화로 정신 노동은 강도가 더 세졌다. 매순간 업데이트되는 정보에 치여 의사결정 장애가 되고, 투명하게 노출된 성과 평가로 조바심은 습관이 됐다. 신체 노동은 눈에 보이는 결과라도 있지만 정신 노동은 시간을 들인 만큼 결과가 꼭 있지도 않다. 내부 검열을 하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상대 비교를 당해 뭉개지기도 한다. 노동하는 동안 기울인 고민과 삽질은 보여 줄 수도 없고 보려 하지도 않는다.
피로한 데다 위협마저 느낀다. 몸은 위험하지 않은데 존재 위협이 탄자니아의 세렌게티 같다. 자신의 관점을 자신과 동일시하다 보니 생각을 공격 당하면 자신이 공격 당하는 기분이다. 원시사회 때는 공룡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꼈는데 지금은 타인의 의견에 위협을 느낀다. 몸은 안전한데 관점과 의견은 전쟁이다. 상사의 지적이 맹수가 달려드는 것처럼 무섭고 동료의 농담이 돌팔매에 맞는 것보다 아프다. 육체 노동을 할 때는 무거운 나무를 나르다 손을 찧고 발목이 어긋났지만 정신 노동을 하는 지금은 자존감이 상처를 받는다. 탱크가 아니라 눈초리가 사람을 쓰러지게 하고 총이 아니라 손가락질이 사람을 비참하게 만든다. 이제 탄광 갱도가 무너질까 염려할 필요는 없지만 자존감이 무너져 내릴까 염려해야 한다. 몸은 멀쩡하지만 마음이 아파서 옴짝달싹도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피곤하고 위험하니 안전한 곳을 찾게 된다. 밑그림에 색칠만 하는 컬러링북이나 그대로 베껴 쓰는 라이팅북을 사는 20대가 늘고 있다. 체력이 달려서 힘이 들거나 머리를 쓰는 취미보다 단순하고 사소하게 심신을 달래기를 원하는 것이다. 요즘 청소년은 편안한 PC 의자에 최고급 모니터가 있는 방에서 매일 게임만 하는 게 꿈이란다. 피곤하고 위험한 세상에서 인터넷 공간은 안식처이자 피난처다. 그래서인지 랜선 집사, 랜선 친구, 랜선 이모, 랜선 삼촌이 늘고 있다. 자신만의 취미, 전문 분야, 일상을 공개하는 1인 미디어가 늘면서 인터넷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랜선이라는 단어에 붙은 신조어다. 고양이를 기르는 영상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하는 랜선 집사가 대표했다. 최근에는 TV, 유튜브, 인스타그램에 출연하는 아이들에게 애정을 보내는 '랜선 이모' '랜선 삼촌'도 유행이다. 좋은 모습, 귀여운 모습만 볼 수 있어 많은 에너지를 쓰지 않으면서 간편하게 사랑을 줄 수 있다. 오래 기다리며 복잡하게 희생하는 쪽보다 쉽고 가볍게 좋은 것만 나누고 싶은 것이다.
생각할 게 너무 많아서 잠시라도 부담없이 무념무상으로 지내고 싶은 마음은 이해한다. 다만 이것이 휴식을 위한 것이어야지 목적 자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가상 공간을 피난처로 여기는 사람에게 현실 세계는 전쟁터가 된다. 여가 시간만 자유로운 사람은 노동하는 동안 수감자가 되는 것이다. 여기를 떠나야 행복해지는 사람은 여기에 있는 동안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행복은 지금 여기에 있는 게 아니라 여기 밖에 있는 것이고 여기를 떠나야 가능한 것이 된다면 얼마나 여기가 고단할까. “이것까지 내가 해야 해?” “왜 내게만 이래?” “내가 이런 일 하려고 여기 온 줄 알아?” “왜 저 사람은 저런 식으로 말해?” “내가 왜 이런 말을 들어야 하나?” “너무 하기 싫다, 떠나고 싶다, 이곳은 내 체질이 아니야” “이곳은 너무 불합리하고 부도덕해” 하며 직장을 거부하고 저항하면 직장에 있는 동안 고문이다. 이 마음을 참느라 우리는 두 배로 힘이 든다. 실재의 내 마음을 감추느라 애를 써야 하고 안 그런 척, 괜찮은 척 연기하느라 또 애를 써야 한다. 7시간을 일했건만 14시간 일한 것 같은 피로도를 경험한다. 다만 책상에 앉아 있었을 뿐인데 입술이 부르트고 온몸이 막일한 것처럼 쑤시는 것이다. 과중한 마음 노동이 신체 노동 못지 않게 사람을 지치게 한다. 무거운 짐을 날라 어깨에 밀려드는 통증만큼이나 마음의 고통도 뻐근하고 쓰라리다.
이제는 몸으로 노동하지 않고 마음으로 노동한다. 식스팩 만들기 위해 근육을 기르는 것 못지 않게 마음 근육을 길러야 한다. 육체 노동이 없어진 이 마당에 마음 노동을 해낼 나의 마음 근력은 얼마나 될까? 일시 가상 공간에 머물면서 현실의 피로와 위험을 피하는 것은 운동을 하지 않고 패스트푸드를 먹는 것과 같다. 몸의 뱃살은 티가 나는데 마음의 군살은 나만 안다.
“단지 관점의 차이일 뿐인데 나는 왜 존재를 거부당한 것처럼 상처를 받을까?” “단지 자신의 생각을 말했을 뿐인데 왜 그것에 나는 이렇게도 영향을 받고 마음을 쓰는가?” “하기 싫으면 관두면 되는데 왜 불평을 하면서도 계속 다니는가?” “정말 가족을 위해서인가? 가족 핑계를 대면서 진짜 내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무얼까?” 등 날카롭게 질문해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솔직해져야 한다. 불편한 진실이 두려워서 만성 통증을 진통제로 연명하는 것은 병을 키우는 일이다. 아무도 나를 해치지 않는데 파충류처럼 이빨을 세우고 생존을 위해 예민해져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자. 파충류가 인간의 탈을 쓰고 이중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기성찰을 하자. 자기성찰은 실로 인간으로서 지성을 회복하는 첫걸음이다.
지윤정 윌토피아 대표이사 toptmr@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