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웬 합의? '규제 샌드박스' 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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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는 출범 당시 네거티브 방식의 규제 도입을 천명했다. 금지 항목을 나열한 뒤 이를 제외한 모든 규제를 풀겠다는 의지였다. 사회 패러다임을 바꾸는 방법론으로도 강조됐다. 규정한 것만 허용하는 포지티브 규제를 버리는 모습이었다. 이를 위해 사회 갈등이 있지만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는 규제 샌드박스에 맡겼다. 현행법상 금지된 사업이라 해도 혁신성과 이용자 편익성이 검증되면 제한된 범위 안에서 시범 운영을 하도록 했다.

규제 샌드박스가 시행 반년 만에 실종됐다. 스타트업 기대감이 차갑게 식었다. 제도 도입 취지가 퇴색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무기력한 행정력이 원인을 제공했다. 정부가 규제 샌드박스 신청 스타트업을 내칠 때 주로 쓰는 단골 멘트는 '합의'다. 다른 부처, 경쟁 업계와의 합의가 안 됐다는 말로 거절 의견을 낸다. 어렵게 안건을 접수하고 사전검토위원회를 통과해도 합의가 안 되면 말짱 도루묵이다. 이 같은 이유로 시간만 허비하게 한다. 본회의에 올라가지 못한 채 보류 상태로 발목 잡힌 안건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알고 보면 합의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법을 벗어난 공무원의 자의 해석일 뿐이다. 정보통신융합법을 포함해 규제 샌드박스를 다룬 어느 법조문을 찾아봐도 합의란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 물론 합의에 담긴 의미 전부를 무시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규제 샌드박스를 신설하고 관련법을 손질할 때 마음먹은 초심은 지켜져야 한다는 뜻이다. 현행법상 안 되는 사업을 가능하게 열어 줄 때는 그만한 용기와 의지가 뒷받침돼야 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의 합의가 끝난 사업 아이템이라면 규제 샌드박스를 신청할 필요도 없다. 합의를 방패막이 삼아 책임을 피하려는 태도는 어렵게 만든 규제 샌드박스를 무력하게 한다. 규제 샌드박스 심의위원회를 무시하는 처사이기도 하다. 위원회는 의결기구다. 참가 위원 다수결로 가결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혁신성에 비해 사회 갈등 요소가 큰 안건이라면 의결을 통해 걸러내면 된다.

피해는 결국 스타트업에 돌아간다. 최악의 상황은 시간 끌기다. 정부는 합의가 덜 됐다며 안건을 손에 움켜쥐고 버틴다. 수개월 넘게 확답을 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하루하루 생존을 건 경쟁에 내몰린 스타트업에는 직격탄이다. 차라리 부결 결론이라도 용기 있게 내주는 편이 낫다. 문제점을 보완, 재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할 일은 신속한 행정 처분이다. 규제 샌드박스 취지대로 망설임 없이 법을 집행해야 한다.


최종희기자 choijh@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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