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서를 가슴에 품은 채 살아가던 퇴준생(퇴사를 준비하는 사람)이 드디어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터(사회인 아르바이터)가 되는 날 친구들은 부러워하며 파티를 열어 준다. 대학교에 합격한 것보다 더 기뻐한 취업이 채 2년도 안 됐다. “나 회사 가고 싶어!”라는 절규가 “회사 나가고 싶어”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통상 13개월을 투자해서 취업 준비를 했는데 고작 18개월 다니고 퇴사한단다. 취직 준비는 끈기 있게 했지만 입사 이후에는 뜻밖에도 오래 버티지 못한다. 이런 요즘 세대를 보는 선배 세대들은 '차라리 그럴 거면 입사하지 말지'라고 한탄한다. 심지어 “이번 신입은 딱 보니까 6개월짜리야. 6개월 버티면 많이 버티는 거다. 내기 할래?”라며 강 건너 불구경하듯 체념하기도 한다. “거 봐, 오래 못 버틸 줄 알았어. 스펙이 과하게 높았어. 나같이 못생긴 나무가 숲을 지키는 법이야”라며 똑똑한 후배가 알아서 나가 주는 것에 안도하는 선배도 있다. 후배들이 퇴사하는 진짜 이유는 파악하지 못한 채 '돈 몇 푼 더 주면 언제든 떠나는 잇속 밝은 젊은 사람들'이라며 싸잡아 분노하기도 한다.
그들이 말하는 퇴사 사유로는 “제가 실력이 부족해서 이 회사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건강상의 이유로 일을 제대로 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집안에 문제가 생겨서 고향에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등이다. 이 사유는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퇴사자 입장에선 솔직하게 마음을 터놓고 속을 나눌 선배가 아니라면 굳이 “이 회사가 이래서 싫다, 이런 이유로 퇴사를 결심했다”라고 진실을 말할 열정이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서류상의 퇴사 사유와 진짜 퇴사 사유 사이 갭이 크다. 진짜 퇴사 사유는 지난 연말 회사 행사에서 회의감을 느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이번 승진 심사 결과에 불공정함을 경험해서인지도 모른다. 지난달 회식 때 농담하는 분위기를 보고 앞날이 막막해서일 수도 있고 오늘 아침 회의 때 일을 지시하는 모습을 보고 앞날이 빤해서일 수도 있다. 내가 나 자신으로 존중 받으며 일할 수 있는 곳인지 회식 자리에서 예상하고, 배우며 성장할 수 있는 곳인지 회의 시간에 가늠한다. 큰 것 때문에 마음이 뜨는 것이 아니라 자질구레한 일상이 쌓여서 결심을 굳히게 된다.
후배들은 실체 없는 회사의 큰 미션이나 비전보다 매일 업무를 하면서 보는 상사의 실체에서 자신의 미래를 본다. 회사 홈페이지에 나오는 '존중, 혁신, 사랑'과 같은 거창한 슬로건은 체감할 수 없지만 선배가 일상에서 하는 행동은 곧바로 체감한다. 여기에서 계속 일하면 내가 얼마나 성장하고 어떻게 쓰일 지 선배 모습에서 가늠한다. 조직에 인생을 저당 잡힌 채 점점 망가져 가는 선배를 보면서 겪는 암담함이 퇴사 이후의 두려움보다 클 때 퇴사를 강행한다.
선배는 뒷방으로 물러날까 노심초사하면서 젊은이들과 대립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을 인도할 의무를 스스로 택하는 사람이다. “선배는 직장을 왜 다니세요?”라는 질문에 “돈 때문이지. 돈 말고 뭐가 있겠나? 적금은 고사하고 카드 값은 막아야지” “이거 말고 할 게 없다. 이 나이에 이만한데도 없지 않겠냐” “어찌 하다 보니 세월이 이렇게 흘렀네. 고비 잘 넘기면서 살다 보니 살아지더라” “결국 임원 되기 위해서지. 직장은 전쟁터다. 살아남으려면 이를 악물고 버텨야 한다” 등의 충고는 후배 세대를 씁쓸하게 한다.
일터에서 단지 기계의 작은 부품처럼 존재하기보다 의미 있게 공헌하길 원하는 밀레니엄 세대에게 이러한 이유는 빈약하고 구차하다. 고연봉 회사를 마다하고 급여 없이 향기치료사(아로마테라피스트) 커리어를 쌓는 퇴사자도 있고, 파트타임으로 순대국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식당 경영을 배우는 퇴사자도 있다. 예전에는 돈 때문에 일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좋은 일의 조건은 소득만이 아니다. 좋은 일은 의미가 있으며, 성장 기회가 있고, 자긍심을 느낄 만한 일이어야 하며, 자율로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란다.
종이 빨대가 플라스틱 빨대보다 기능이 떨어지고 비싸더라도 환경 보호라는 더 큰 가치를 위해 이용하겠다는 밀레니엄 세대다.
이런 후배들에게 조언하려면 일의 가치와 성장의 경험을 나눠야 한다. 회사소개서에 나올 법한 그럴싸한 슬로건 말고 선배의 생생한 실패담과 성공담이 필요하다. 좌절했지만 극복할 수 있도록 해 준 나의 고뇌와 철학이 필요하다. 일에 대한 자신만의 이데올로기가 있어야 하고, 가치관이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선배부터 밀레니엄 후배들의 관심사에 자문자답해야겠다. “왜 이 일을 하는가? 이 일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가? 이 일이 사회에 어떻게 기여하는가? 우리 조직은 공동의 선을 위해 어떻게 사회 가치를 실현하는가? 스스로 성장 경험을 하고 있는가? 최근 업무를 보면서 성장하고 보람을 느낀 경험은 무엇인가? 궁극으로 나는 왜 살고 일을 하는가?”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동안은 앞만 보고 달렸다 하더라도 이제는 멈춰 서서 숨을 고르자. 후배들이 우리 등 뒤를 보고 있다. 후배는 회사에 사명감이 부족해서 떠나는 게 아니라 회사의 사명감을 발견하지 못해서 떠나는 것이고, 자신의 삶에 주어진 사명을 찾기 위해 떠난다. 회사에 충성심이 부족해서 떠나는 게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충만함이 더 중요해서 떠나는 것이다. 퇴준생 후배를 만나기 전에 나부터 만나야겠다.
지윤정 윌토피아 대표이사 toptmr@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