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고도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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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상한 나무만 있는 시골길. 디디와 고고는 '고도(Godot)'를 기다린다. 소년이 나타나서 “고도가 오늘은 못 오고 내일은 꼭 온다”는 말을 전한다. 내일은 또 다른 오늘이 된다. 소년이 똑같은 말을 전한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된다.

사뮈엘 베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한 대목이다.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모습은 법제화를 기다리는 개인간거래(P2P) 금융업계를 떠올리게 한다. 금융위원회가 공청회에서 보여 준 법제화 의지는 4월 국회 파행으로 좌초됐다. 6월에 임시국회가 열린다지만 다른 현안에 밀릴 공산이 크다.

당분간 투자자 보호 장치는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다. 여기에 P2P 금융업계의 연체·부도·사기 이슈가 터지자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한국P2P금융협회 회원사의 평균 연체율도 정점을 찍었다. 인터넷에서도 P2P 금융 업체에 투자해도 되는지를 묻는 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실제 주위에서도 투자한 돈을 상환받지 못했다는 사례도 자주 접한다.

법제화 이슈가 떠오르면서 몇몇 업체는 역효과를 보기도 했다. 다른 금융기관과의 협업이 법 제정 이후로 미뤄진 것이다. 사업부터 추진했다가 뒷날 법에 저촉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금융은 다른 분야보다 규제 영향력이 크다. 규제에 따라 시장 자체가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다. P2P 금융업계가 성장 정체기에 들어선 이유다.

지난해 P2P 금융 시장 규모는 5조원이었다. 2016년 6000억원에서 3년 사이 급성장했지만 최근 들어 성장 속도가 둔화됐다. 국내 간편결제 시장 규모가 39조원인 점을 감안하면 대표적인 핀테크 서비스라 보기엔 갈 길이 멀다.

최근 만난 업계 관계자는 초창기의 비바리퍼블리카와 레이니스트, P2P 금융 업체를 동시에 만난 시절을 회고했다. 당시 이들 3개 업체 모두 작은 규모의 스타트업이었다. 몇 년 만에 비바리퍼블리카는 은행업, 증권업에까지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레이니스트도 혁신 금융 사업자로 자리 잡았다. 그에 비해 P2P 금융 업체는 성장 속도가 빠르지 않다며 해당 관계자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비바리퍼블리카와 레이니스트는 제도권 안으로 들어선 반면에 P2P 금융은 '법제화' 이슈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P2P 금융 시장이 고도(高度)로 넘어가기 위해선 '고도'가 와야만 한다. 6월 임시국회를 앞둔 업계는 자리를 뜨지 못한 채 스스로에게 주문만 건다. “우리는 고도를 기다려야 해.”


함지현기자 goham@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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