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가까운 시일 내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CBDC) 발행 계획이 없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블록체인(분산원장) 기반 토큰 방식이 아닌 '계좌개설형 디지털 화폐'조차 금융안정을 저해할 수 있다며 조심스러운 태도를 견지했다.
권오익 한국은행 부연구위원과 김영식 서울대 교수는 한은이 CBDC를 발행하면 상업은행 요구불예금을 대체하게 된다는 요지의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 발행이 금융안정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를 7일 발간했다. 요구불예금은 예금주 요청이 있을 시 언제든지 지급할 수 있는 통화성 예금으로 현금과 함께 협의통화(M1)로 분류된다.
보고서는 비트코인, 이더리움 등 블록체인(분산원장) 방식이 아닌 '계좌개설형' CBDC를 채택했다. 블록체인 방식 CBDC에서는 거래 검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연구팀은 중앙은행 자체 신뢰도가 있기 때문에 검증 절차가 없는 단일원장으로만 실험했다고 설명했다.
연구팀 모형에 따르면 CBDC는 현금과 같은 안전자산으로 취급되고 보유량에 일정 이자를 지급한다. 상업은행 요구불예금과 완전 대체가 가능하다. 개인은 요구불예금 대신 CBDC를 택하게 된다. 중앙은행이 발행한다는 점에서 요구불예금보다 안전자산으로서의 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대출 금리가 오르고 유동성은 부족하게 된다. 상업은행 대출 재원 중 가장 저렴한 요구불예금이 감소하다 보니 상업은행은 상대적으로 조달 비용이 큰 은행성 수신 등에 의존해야 한다. 그 비용을 메꾸기 위해 대출 금리를 올리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상업은행이 예금 입·출금 업무보다는 대출 업무에 주력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는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 의견과 맥락을 같이 한다. 루비니 교수도 지난해 12월 “예금이 전액 CBDC로 들어가면 시중은행 역할이 장기대출 중개 정도로 축소될 것”이라고 진단한 바 있다.
연구팀은 “CBDC로 대체되는 요구불예금만큼 중앙은행이 상업은행에 대출해주면 상업은행 신용공급이 축소되지 않고 금융안정도 해치지 않을 수 있다”면서도 “하지만 이를 위한 법적 근거가 마련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한은은 지난달에도 가상통화 태스크포스(TF)에서 발간한 '중앙은행 디지털화폐' 보고서로 CBDC 발행 계획이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앞서 금융결제국 차원에서 진행한 블록체인 소액결제 모의테스트에서도 '블록체인을 실제 자금이체에 적용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결론을 냈다.
당장 블록체인이나 디지털 화폐 등 신기술을 도입하기에는 금융 분야 문턱이 높다고 판단한 것이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세계 중앙은행 70%가 CBDC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 하지만 상용화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지난달 인도 중앙은행도 '시기상조'를 이유로 암호화폐를 활용한 CBDC 발행 계획을 보류했다.대만 중앙은행 총재도 CBDC 발행에는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함지현기자 goha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