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개정이 화두다. 과학기술계도 개헌을 통해 과학기술이 경제 발전 도구로 규정된 기존의 헌법을 바꿔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발의하는 개헌안에는 이러한 의견이 일부 반영돼 과학기술 역할이 국민 경제 발전과 국민 삶의 질 향상으로 확대됐다. 물론 여전히 과학기술 개념이 수단으로 해석될 수 있어 아쉬운 부분도 있다.
과학기술 조항과 별개로 인권 조항을 신설한 것은 환영할 일이다. 성폭력, 아동 학대, 노인 비하, 비정규직 차별 등 최근 사회에서 많이 이야기되는 주제를 살펴보면 그동안 우리의 인권 의식이 성숙하지 못했음을 깨닫게 된다. 넓게 보면 과학기술보다 더 중요한 인권조차 헌법에서 위상이 낮은 셈이었다.
과학기술계 역시 인권 성찰이 필요하다. 가장 큰 잘못은 우리가 인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오랜 시간을 들여 논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21세기 들어서면서 과학기술이 경제·산업 분야를 넘어 국가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졌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를 강조하면서도 인권 보호에 적극이지 않았다는 점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몇몇 과학기술인들이 인권 기구에 참여하거나 활동한 적은 있지만 주체로서 이끈 경우는 드물다. 편리·효용성을 따져 연구개발(R&D)한 결과물이 사회 및 윤리 부작용을 초래하거나 악용되고 있는 건 아닌지 살펴야 하는 책무는 게을리 했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이 올해 중요하게 추진하는 과제가 과학기술계에서 인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시작은 다음 달 5일 '과학과 인권' 주제로 열리는 한림원탁토론회다. 아직 생소한 '과학기술과 인권' 개념을 함께 고민해 보고, 우리가 어떠한 역할을 할지 화두를 던져서 의견을 받을 계획이다.
10월에는 한림원이 유치한 '제13회 국제한림원·학회인권네트워크(IHRN) 정기회의'를 한국에서 개최하고, 국내에 해외 과학기술인의 인권 활동을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1993년 미국과학한림원(NAS)을 주축으로 설립된 IHRN은 인권 분야에서 과학기술 대표 국제단체로, 80여개국 학술기구가 참여했다. 과학단체는 자국 상황에 따라 개별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고, 소속 단체 문제에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지난 20여년 동안 억류·구금된 600여 과학기술인을 구출하는 성과도 거뒀다. 2년에 한 번 개최되는 국제과학인권회의에는 소속된 학술기구 대표단이 참여해 각국 과학기술인 인권 현황을 점검하고 공통 의제를 토론한다.
한림원은 2013년에 과학인권위원회를 발족하고, 2014년부터 국제과학인권회의에 참여했다. 한림원 과학인권위에 참여하는 11명의 위원은 지난해부터 모임을 열고 활동 방향을 잡고 있다. 과학기술인의 인권 보호를 위해서 국내 연구 환경이나 제도·문화 등을 살펴보고, 나아가 북한 과학자의 인권 문제도 고민해야 한다.
과학 기술 발전에 따라 위협 받을 수 있는 보편 인권에 대해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개별 활동을 논의하기 전에 과학기술 인권 개념을 정의 내리고 널리 알리는 것도 필요하다. 그동안 활동이 미진해 온 만큼 갈 길이 멀다.
현재 IHRN을 이끌고 있는 사람은 2008년에 노벨화학상을 받은 마틴 챌피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다. 지난해 국제과학인권회의를 논의하기 위해 만났을 때 그에게 '한림원의 경고나 선언에 강제성이 없음에도 효과를 발휘하는 이유'를 물었다.
챌피는 “과학기술인의 활동과 노력이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를 측정하기는 어렵지만 반대로 침묵한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면서 “인권을 위협받는 사람이 우리 활동에 힘을 얻는다면 그 자체로 의미 있다”고 대답했다.
한국 과학기술계가 인권을 논의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 스스로 학문의 자유와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것을 대신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명철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 mclee@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