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놓고 연구 현장이 혼란에 빠졌다. 노·사 의견이 극단으로 대립하는 가운데 정부도 고심을 거듭했다. 지침 마련이 지연되면서 노·사 갈등이 폭발 직전이다.
출연연은 비정규직 비중이 높은 공공기관이면서 '연구기관'이라는 특수성도 있다. 정부는 '비정규직 제로'라는 정책 목표와 연구 역량 극대화 사이에서 부심하고 있다.
당초 9월 중 가이드라인이 마련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추석은 물론 국정감사 기간도 넘길 공산이 크다. 정규직 전환 희소식을 기대해 온 비정규직은 빈손으로 추석 귀성길에 오르게 됐다. 가이드라인 발표 이후에도 기관 사정에 따라 노·사, 노·노 간 갈등의 불씨는 여전할 것으로 우려된다.
27일 연구계와 관가에 따르면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마련하는 '출연연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 발표가 추석 이후로 늦춰질 전망이다. 다음 달 중에 가이드라인이 수립될 지도 불투명하다. 과기정통부는 애초 이달에 가이드라인을 발표할 계획이었지만 '연구 현장 추가 의견 수렴'을 이유로 한 차례 연기한 상태다.
출연연 비정규직 문제는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불거졌다. 과거부터 축적된 문제지만 문재인 정부가 '공공기관 비정규직 제로'를 공언했다. 연구기관과 정부가 원론 차원에서 공감하던 문제를 수면 위로 끄집어냈다. 문제는 정부 방침이 지나치게 설익었다는 점이다. 현장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속도전이라는 비판과 약속을 지킬 의지가 없다는 비판이 노·사 양측에서 나온다.
과기정통부가 마련할 가이드라인은 이에 앞서 고용노동부 주도로 만들어진 범부처 가이드라인의 연장선이다. 범부처 가이드라인은 연중 9개월 이상, 앞으로 2년 이상 지속 예상 업무를 '상시·지속 업무'로 봤다. 해당 직무 수행자는 정규직 전환 대상이다.
이를 출연연 현장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 위촉연구원, 박사후연구원, 단기계약직, 행정직·연구직 등 직무와 고용 형태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특정 연구 과제 수행을 위해 고용하는 사례도 있다. 어디까지를 상시·지속 업무로 봐야 할지 모호하다.
과기정통부는 범부처 가이드라인을 구체화하고 출연연의 특성을 반영한 별도 가이드라인을 마련한다. 상시·지속 업무 판단 기준이 핵심이다. 출연연은 이에 따라 전환심사위원회를 가동, 전환 규모와 일정을 확정한다.
다양한 변수가 불거졌다. 우선 특정 업무가 지속될지 예측하기 어렵다. 보통의 공공기관과 업무 성격이 판이하기 때문이다. 연구 과제는 변동성이 크다. 정부와 출연연은 과거 재계약 선례가 있는 직무는 지속 가능한 업무로 분류하기로 뜻을 모았다.
비정규직 통계에 잡히지 않은 박사후연구원(포스닥)은 어떻게 볼 것인지도 문제다. 포스닥 역시 상시·지속 업무를 수행한다면 전환 대상에 포함시키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일부 기관은 포스닥을 포함해 잠정 전환 규모 산출 작업에 들어갔다.
이 경우 전환 규모는 예상보다 늘어난다. 정부가 공식 집계한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소관 출연연의 비정규직은 지난해 기준 3714명이다. 전체 인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3%에 이른다. 이 통계에 포스닥은 포함되지 않았다.
출연연에 소속된 포스닥은 65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까지 포함하면 비정규직 비중은 30%에 육박한다. 포스닥은 박사 학위까지 갖춘 고급 인력인데도 고용 불안을 겪는다.
전환 방식도 논란거리다. 일부 인원은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할 가능성이 짙다. 정부는 무기계약직 전환이 고용 안정 효과에서 정규직 전환과 큰 차이가 없을 것으로 본다. 이에 대해서는 노·사 간 이견이 있지만 현실상 불가피한 측면이 있는 것으로 입장 차를 좁히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공개경쟁' 도입이다. 출연연 경영진은 이왕에 정규 인력을 뽑는다면 연구 역량 극대화를 원한다. 현재 원내에서 근무하고 있는 비정규직을 일괄 전환하는 게 아니라 외부 취업 희망자와 경쟁시켜서 인력을 뽑자는 얘기다. 이 같은 방침에 공공연구노조, 현장 비정규직 등이 강력 반발했다. '전환'이 아닌 '신규 채용'으로 오히려 고용 안정성을 떨어뜨린다는 주장이다.
과기정통부는 공개경쟁 도입 여부를 비롯한 쟁점 조율에 부심하고 있다. 지난 15일 가이드라인 발표가 연기된 것도 출연연 측이 공개경쟁 도입을 강하게 주장했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졌다. 외부 전문가와 노·사 의견 수렴에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공개경쟁 도입 여부는 찬반양론이 워낙 팽팽하게 대립하는 사안이어서 여러 의견을 들을 필요가 있다”면서 “최대한 많은 현장 의견 수렴과 전문가 자문을 위해 시간을 두고 준비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송준영기자 songjy@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