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곡의 근대사를 겪은 대한민국은 건국 이후 20년을 주기로 인류 문명의 4단계 발전을 압축 경험했다. 우리나라는 불과 반세기 전인 1960년대까지만 해도 국민소득 500달러 미만의 농업 기반 사회였다. 이 과정에서 국난을 극복하고 신속하게 근대 국가로 이행했다.
1980년대까지는 중화학 산업을 기간산업으로 일궈 내면서 국민소득 2000달러 시대의 산업사회 기반을 확고히 구축했다. 2000년대까지는 정보 기반 사회로의 전격 이행을 통해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라는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국민소득 2만달러의 토대를 확립했다. 21세기 첫 20년은 4차 산업혁명이라는 인류 문명사의 대분기점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너무 숨 가쁘게 허덕이며 달려온 탓일까. 우리는 그동안 성취한 기득권에 안주하면서 혁신 주체로 거듭나지 못하고, 3만달러 국가의 관문을 넘지 못하고 있다. 세계적인 경영학자 짐 콜린스의 '위대한 기업은 다 어디로 갔을까'에서 주창하는 기업이 몰락하는 5가지 단계를 오늘날 우리 상황에 적용해 보면 놀랍도록 들어맞는다.
1단계에는 성공에 대한 자만심 단계(Hubris born success)다. 빠른 시간에 선진국 문턱을 올라선 경제 성장에 스스로 놀라면서 자만심이 생기는 상황이다. 2단계는 욕심이 과하고 원칙 없이 사업을 확장하는 단계(Undisciplined pursuit of more)다. 섣부르게 성공한 자만심으로 핵심 역량을 충분히 축적하지 못한 채 단기 성과에 얄궂게도 집착한다.
3단계는 위험과 위기의 가능성을 무시하는 단계(Denial of risk and peril)이다. 국정 운영의 부정적인 지표를 무시하거나 다가올 위기에 적극 대응하지 않고 여전히 기존 관행과 방식을 고집한다. 4단계는 구원을 찾아 헤매는 단계(Grasping for salvation)다. 경제사회 시스템의 고비용과 저효율이 누적되고, 위기 증상이 갑자기 악화됨에 따라 각종 국정 운영 시스템이 불능이 빠지면서 사회 혼란이 증폭된다.
마지막으로 5단계는 망하거나 유명무실해지는 단계(Capitulation to irrelevance or death)로, 국가 자율성을 상실하고 위기에 빠지는 국면이다. 혼란과 분열로 국가 존립 위기에 직면한다.
물론 이러한 진단은 우리의 잠재 역량을 과소평가하는 비관적인 관점일 수 있다. 그러나 작금의 국정 농단 사태를 겪으면서도 대통령 선거 주자들의 선심성 공약과 상대 후보 흠집 내기 난타전을 지켜보면서 왠지 콜린스의 기업이 망하는 국면이 연상된다. 4차 산업혁명 물결은 질풍노도처럼 밀려오고, 한반도 안보 상황은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럼 현 국면에서 대통령 리더십은 어떻게 표출돼야 할까. 먼저 새로운 대통령은 19세기 산업화와 근대화 역사의 교훈을 가슴에 품고 21세기 신시대를 열기 위한 신국가상을 선연하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전제 아래 국가가 직면하게 될 위기를 뛰어넘고(Beyond Crisis), 성장의 발목을 잡는 국가적 한계를 극복하는(Beyond Limit) 희망의 프로젝트를 발굴해야 한다. 이 경우 제약 요건이자 발전 가능 요건을 정확한 지표와 통계를 제시하면서 국민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정책 설계였으면 한다. 오늘날 우리 상황은 위기 시나리오와 기회 시나리오가 뒤섞어 얽힌 새끼줄 같은 형국이다.
모름지기 정치의 역할은 국민에게 기회 측면을 확장함과 동시에 위기 측면을 최소화하는 데 있다. 경부고속도로, 정보고속도로의 선경험과 초연결지능 고속도로의 선제 구축을 연계하는 도약형 국가 전략으로 국민의 가슴을 고동치게 할 수는 없을까.
아널드 토인비는 “인류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연속이며,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지 못하는 민족은 같은 역사의 반복을 경험한다”고 준엄한 경고를 남겼다. 대전환기의 국가 지도자는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라는 본원적 질문에 답해야 하는 중차대한 소명 의식을 지녀야 한다.
하원규 ETRI 네트워크연구본부 초빙연구원(wgha@etr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