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분석]병원에 부는 'AI 신드롬', 혁신의 시작일까 찻잔 속 태풍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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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에서 시작된 인공지능(AI) 돌풍이 병원까지 파고들었다. 4차 산업혁명 바람 앞에 AI는 혁신의 출발점으로 떠올랐다. 정보통신기술(ICT)에 민첩한 국내 산업 지형과 생존의 기로에 선 병원은 세계에서도 AI 도입 비율이 앞선다. 병원을 포함해 헬스케어 산업으로 번지는 AI. 혁신의 아이콘이 될지 찻잔 속 태풍이 될지 주목을 끌고 있다.

◇세계 톱3 'AI 도입국', 의료 혁신 시작됐다

알파고가 불러온 AI 신드롬은 병원에서 IBM '왓슨'이 바통을 이어 받았다. 코그니티브(인지) 컴퓨팅 솔루션 왓슨은 빅데이터를 분석해서 자연어로 된 질문을 이해하고 답을 제시한다. 매일 쏟아지는 300여종의 의학저널, 200여종의 의학 교과서, 1500만쪽에 달하는 의료 정보를 학습해서 최적의 치료법을 제시한다. 암 진단·치료에 도움을 주는 '온콜로지' △유전자 분석에 초점을 맞춘 '지노믹스' △임상 시험을 돕는 '클리니컬 트라이얼 매칭' △연구개발(R&D)용 '라이프 사이언스' 등이 대표 솔루션이다.

2015년 국내에 첫선을 보인 왓슨 포 온콜로지는 지난해 9월 가천대 길병원을 시작으로 부산대병원, 건양대병원, 계명대 동산의료원, 대구 가톨릭대학병원, 중앙보훈병원 등 6개 병원이 도입했거나 도입할 예정이다. 세계 각국과 비교해서 도입 비율이 높다. 왓슨 포 온콜리지를 도입한 병원은 중국이 50곳으로 가장 많다. 인도가 마니팔 병원 그룹 내 16곳이 도입해 뒤를 이었다. 우리나라(5곳)는 3위다. 미국이 4개 병원, 태국·네팔·네덜란드가 각 1곳이다.

서울대병원, 연세의료원, 서울아산병원, 삼성서울병원, 서울성모병원, 아주대병원 등 국내 대형 병원도 대부분 자체 AI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 대부분 환자 의료 정보를 분석해서 의사가 발견하기 어려운 병변을 알려주거나 임상 의사 결정을 돕는 데 초점을 맞췄다.

◇풍부한 ICT 인프라·기형적 병원 산업 구조가 만든 'AI 신드롬'

우리나라 병원이 왓슨을 포함한 AI 도입에 적극적인 것은 높은 ICT 포용력이 작용했다. 전통적으로 최신 ICT 도입에 민첩, '테스트베드'로 불렸다.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헬스케어 영역에서도 변화가 시작됐다.

풍부한 인프라도 한몫한다. AI 핵심은 '데이터'다. 정제된 데이터로 기계를 학습시켜서 원하는 결과 값을 얻는다. 우리나라는 ICT 역량 외 풍부한 '의료 정보'라는 가장 큰 무기를 보유했다.

우리나라는 사실상 전 국민이 건강보험 적용을 받는다.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어렵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환자, 의사, 의료기관, 진료내역 등 청구명세서 정보만 5840억건을 보유하고 있다. 질병군, 요양병원 진료 현황과 각종 질병 정보, 의약품 정보 등 수백만건의 핵심 의료 정보를 데이터베이스(DB)화했다.

대형병원도 마찬가지다. 세계 최고 의료정보화 수준을 바탕으로 병원 당 수백테라바이트(TB)에 이르는 의료 정보를 구축했다. 원유(데이터)가 풍부한 만큼 정유시설(AI 시스템)만 들어오면 당장이라도 석유를 공급할 수 있는 최적 조건이다.

근본 원인은 기형적 병원 산업 구조를 든다. 우리나라 병원 산업은 환자 진료 외 부가 수익 사업에 제약이 많다. 환자 수에 생존이 달렸다. 환자가 밀려드는 수도권 대형병원을 제외한 지방 중견병원은 차별화가 필요하다. 첨단 의료시스템으로 대변되는 AI를 도입해 환자를 잡겠다는 전략이다.

이언 가천대 길병원 인공지능정밀의료추진단장은 “이른바 빅5라 불리는 서울 대형병원을 따라가기 위해 단순 설비 투자를 넘어 사회적 신뢰성을 확보하는 게 필수”라면서 “병원 시스템을 송두리째 바꾸는 혁신이 필요하다. 우리는 AI 기반의 병원으로 돌파구를 마련한다”고 말했다.

◇왓슨 효과 “병원 산업 구조 개편” vs “국내 환경에 맞지 않아”

국내 병원이 AI에 거는 기대는 크다. 기형적 병원 산업 구조를 해소하고 첨단화를 앞당길 구세주로까지 평가한다. 하지만 AI 신드롬을 몰고 온 '왓슨'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국내 최초로 IBM 왓슨을 도입한 가천대 길병원은 의료 서비스 혁신이 시작됐다고 분석한다. 지난해 11월 진료를 시작한 가천대 길병원은 현재 236명이 왓슨 포 온콜로지로 치료법을 추천받았다. 대장·직장암이 71명, 유방암 61명, 폐암 50명, 위암 39명, 자궁암 15건이다.

의사 추천이나 환자 신청 등으로 대상자를 선정한다. 병명·중증도·종양부위·환자나이 등 의료 정보를 입력하면 IBM 왓슨이 의학저널, 교과서, 미국 메모리얼슬론캐터링 암센터 진료 기록 등을 분석해 환자 정보와 대조·분석한다. 항암요법·수술·방사선치료 등 치료법 후보를 제시하고, 생존율과 적용 시기 등을 제안한다. 의료진이 왓슨 추천법을 놓고 토론을 거쳐서 최종 치료법을 선정한다.

가천대 길병원은 왓슨 도입 후 의료 서비스 신뢰도 제고, 의료진 역량 강화, 환자 서비스 만족도 개선 등 효과를 거뒀다고 평가했다. 290여종의 의학 전문 문헌과 200여종의 의학교과서, 글로벌 암센터 진료 기록을 폭 넓게 학습한 왓슨이 임상 결정 신뢰도를 높인다.

세계적으로 하루 평균 122건씩 새롭게 발표되는 방대한 분량의 암 논문을 실시간 수집·분석한다. 의료진이 놓치기 쉬운 최신 정보를 알려준다. 보조 수단이지만 기계에 뒤질 수 없다는 의료진 경쟁심을 유도하는 것도 효과다. 환자가 의사 의견보다 기계를 신뢰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역량을 강화한다.

왓슨을 이용한 암 진단은 기본적으로 여러 의료과가 모인 다학제 협진에 기반한다. 환자 1명에 3~6명의 의료진이 모여 토론한다. 환자 당 진료시간이 수분에 불과한 우리나라에서 다수 의료진이 환자 한 명을 위해 모인다는 것은 환자 만족도를 높이는 요인이다.

다학제 협진이 뿌리를 내리면 의료 서비스 수준 제고와 만족도 상승 등 병원 문화 혁신에 도움을 준다. 환자 만족도를 조사한 결과 10점 만점에 9.3점이다.

가천대 이 단장은 “왓슨 도입 후 가장 큰 변화는 다학제 협진을 포함한 진료 문화가 바뀌었다는 점”이라면서 “의료진도 동료 의사나 기계에 뒤지지 않기 위해 환자를 더 열심히 진료하면서 각종 실수를 줄이고, 환자 만족도를 높인다”고 설명했다.

왓슨만 한정했을 때 전반적 암 치료 효과는 높지 않을 것이라는 반론도 많다. 왓슨을 도입한 병원은 하나같이 '암 진단·치료 역량 강화'를 외친다. 상당수 의료진은 왓슨 하나로 역량이 높아졌다는 것은 확대 해석이라고 지적한다.

암 진단 영역에 왓슨은 일종의 참고서다. 왓슨이 학습한 데이터는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주로 생성됐다. 한국인에 적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제 효과가 입증되지도 않았다. 왓슨이 제시한 치료법 역시 우리나라 의료진 대부분이 생각하는 수준에 그친다. 우리나라는 위암, 간암, 자궁경부암 5년 생존율은 미국·캐나다보다 높다. 대장암, 유방암도 비슷하다. 암 치료 수준이 세계적이다.

장혁재 연세의료원 의료정보실장은 “왓슨 하나 도입했다고 병원 암 치료 수준이 높아졌다는 것은 기존 역량이 부족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라면서 “왓슨은 잘 정리된 참고서와 같은데 세계적 암 치료 수준을 갖는 우리나라에서는 큰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신뢰도를 문제 삼기도 한다. 왓슨이 학습한 데이터나 연구에 대해 발표된 문헌이 많지만 실제 치료 효과를 제시한 논문은 단 한 건도 없다는 설명이다. 인도 마니팔 병원이 지난해 유방암·대장암·직장암·폐암 환자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인간과 왓슨의 진단 일치 확률은 78%였다. 직장암은 85%가 일치했지만 폐암은 17.8%만 일치했다.

김치원 서울와이즈요양재활병원장은 “왓슨 자연어 처리 논문은 다수 발표됐지만 왓슨 포 온콜로지가 치료에 어떤 도움을 주는지에 관한 논문은 정식 발표되지 않았다”면서 “제대로 된 임상결과를 제시하지 않는다면 신뢰성 논란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방·국공립 병원 도입 가능성 높아

국내 병원에 왓슨 돌풍은 올해도 이어질 가능성이 짙다. 병원 수익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암 환자를 뺏기지 않기 위해 '왓슨 효과'에 큰 기대를 건다. 지방병원에 이어 국공립 병원도 가능성이 있다. 정부 예산으로 운영되는 국공립 병원은 상대적으로 비용 부담이 적다. 중앙보훈병원이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정부조차 4차 산업혁명을 외치는 상황에서 국공립 병원에서 왓슨은 비교적 손쉽게 대응하는 수단이다.

국내 왓슨 사업을 벌이는 한국IBM과 SK주식회사 C&C가 영업을 강화하는 점도 구축 사례를 늘릴 요소다. 의료 서비스 개선, 연구 역량 강화를 외치는 지방 병원과 AI 분야 리더를 목표로 하는 IBM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다.

대형병원 관계자는 “한국IBM이 지난해 빅5 병원에 제안한 왓슨 도입 비용이 30억원이나 됐지만 최근 5억원에 제안하는 경우도 흔하다”면서 “수익보다 마케팅 효과에 초점을 맞추면서 낮은 비용으로 도입을 유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빅5'를 비롯해 수도권 대형병원의 도입 가능성이 희박하다. 가천대 길병원 등 지방병원이 왓슨 이슈를 선점한 상황에서 뒤늦게 도입하더라도 효과가 미미하다. 자체 개발이 전략적으로 의미가 크다. 우리나라 진료 환경을 고려할 때 왓슨 도입의 한계도 명확하다.

미국처럼 환자 당 진료 시간이 긴 국가는 왓슨을 이용해 다양한 토론과 방법을 모색한다. 우리나라는 환자 당 진료 시간이 평균 3분 정도다. 밀려드는 환자로 진료 시간이 짧은 상황에서 왓슨을 살펴볼 여유가 없다. 대형병원의 암 치료 역량을 고려, 왓슨 도입의 효용성도 크지 않다.

장 실장은 “선진국처럼 의사 당 환자 진료 시간을 충분히 보장받을 경우 왓슨을 포함해 다양한 솔루션을 이용하겠지만 우리나라는 짧은 시간에 환자를 봐야 하기 때문에 실효성이 낮다”면서 “우리나라 의료 실정을 포함해 의약품, 환자 정보 등이 다르기 때문에 병원 전반에 확산되기에는 장애물이 많다”고 말했다.

왓슨을 비롯한 AI 시스템에 대한 의학적·윤리적 이슈, 신뢰도 향상, 추후 환자 부담 여부 등도 앞으로 제기될 가능성이 높다.


정용철 의료/SW 전문기자 jungyc@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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