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온뉴스 이주희 기자] 2016년 영화계를 하나의 키워드로 묶는다면 ‘다양성’이다. 재난영화만 하더라도 좀비물, 1인 재난영화, 최초의 원전 소재가 등장했고, 작품성으로는 인정받더라도 흥행까지 이어지기 힘든 퀴어영화인 ‘아가씨’, 일본 위안부 문제를 다룬 ‘귀향’이 흥행에 성공하기까지 했다. 로맨스의 경우엔 한국영화로 보기 힘들었지만, 재개봉 영화가 이를 대체했다. 배우나 감독들 역시 ‘열일’하는 ‘천만 배우’들이 있었지만, 거물 신인들이 등장해 새로움을 더했다.
◇ ‘지금 여기’에 주목한 ‘현실 영화’들
지난해 개봉한 ‘내부자들’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을 맞이해 다시 한 번 회자됐다. 극중 백윤식의 대사인 “대중은 개ㆍ돼지입니다”는 당시만 해도 너무 센 발언으로 여겨졌지만, 이후 실제 구체적인 사건으로 나타나 충격을 줬다. 이에 제37회 청룡영화상은 올해 쟁쟁한 작품을 물리고 ‘내부자들’을 최우수작품상으로 선정했다.
뿐만 아니다. ‘부산행’ ‘터널’ ‘판도라’까지 또 다른 시선으로는 재난영화로도 볼 수 있는 이 영화들은 현실을 투영한 영화들로 더 주목 받았다. ‘재난’보다는 ‘현실성’이 더 관객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들은 재난이 닥치더라도 국가는 구해주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이야기를 끌고 나갔고, 이에 대중들은 겁에 질렸다. 특히 ‘부산행’에서는 전국에서 폭동이 벌어지는데, 뉴스는 “정부 대응으로 안정되고 있으니 악성 유언비어에 동요하지 말라. 지금은 정부를 믿어야 할 때다. 국민들 안전에는 이상이 없다”라고 말해 관객들을 씁쓸하게 했다.
‘터널’에서 구조할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터널이 무너지자 주인공은 사람들이 자신을 구원해줄 것이라고 굳게 믿지만 소장을 제외한 119는 느긋하다. 구조보다 윗선에 보고하느라 사진 찍기에 급급한 정부 고위관계자의 모습까지 관객들의 화를 부르는 행위들이 이어진다. 김성훈 감독은 이런 상황을 웃음으로 가장해 현실을 풍자했다.
‘부산행’이 은유적으로 이야기 했다면, ‘판도라’는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다뤘다. 실제 문제가 있는 노화된 원전 문제를 꺼낸 것이다. ‘판도라’에서 평섭(정진영 분)이 해결 방법을 제시하지만, 원전의 관리자는 아직 정부의 승인이 안 났다고 그를 막는다. 윗사람들은 “상황이 그렇게 안 좋나요?”라고 순진한 표정으로 묻고, 재난 콘트롤타워는 언론을 콘트롤하는데 급급하다. 마을 주민들은 그 사실도 모르고 피난소라는 곳에 갇혀 있다. 재난팀은 가장 안전한 곳이라며 주민들을 피난소에 몰아넣지만, 그곳은 여론을 통제하고 주민들을 관리하기 편한 곳일 뿐이다. 이렇게 ‘판도라’는 안전한 곳인 줄 알고 세월호 선체 내부에서 목숨을 잃은 아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들 영화들은 재난 영화의 특성상 신파로 흘러가지만, 블록버스터의 스케일과 상업영화의 미덕을 가지고 있어 사랑받았다. 사회 고발적인 영화가 따뜻한 가족애와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바탕으로 만들어져 현실에 대한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 대한민국은 범죄오락액션만 된다? ‘좀비’부터 ‘퀴어’까지 다양한 장르 사랑받다
-좀비 ‘부산행’(1156만), 퀴어영화 ‘아가씨’(428만), 코미디 ‘럭키’(697만), 대한민국 ‘귀향’(358만)
기존에 좀비물이 존재했지만, 독립영화 등에서 작게 만들어졌었다. ‘부산행’은 최초의 좀비 블록버스터로 세계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소재인 좀비를 한국화했다. 본격 좀비물이라고 예고한 것처럼 ‘부산행’에는 좀비가 우르르 쏟아진다. 특수분장과 CG로 완성된 좀비떼는 자연스러운 비주얼을 선사하며 우리나라 최초 좀비 블록버스터로서 전혀 부족함 없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부산행’은 ‘월드워Z’ ‘28일 후’ ‘나는 전설이다’ 등 다양한 좀비물로 눈이 높아져 있던 관객들에게도 인정을 받았고, 칸 영화제에서도 좋은 반응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1156만 관객을 모으며 2016년 유일한 ‘천만영화’가 됐다.
퀴어영화인 ‘아가씨’는 청소년관람불가로 수위 높은 신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히데코와 숙희, 그리고 백작으로 이어지는 심리 묘사와 아름다운 미장센들이었다. 관객들은 열광했고, 공식 개봉하지 않았던 감독판을 극장에 걸 정도로 강력한 팬덤을 과시했다.
‘럭키’는 많은 작품에서 명품 조연으로 활약한 배우 유해진의 원톱 코미디물이다. 유해진은 명품 조연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원톱으로는 크게 티켓 파워를 가늠할 수 없는 배우이기도 했다. 하지만 ‘럭키’는 역대 코미디 영화 중 최단 기간인 3일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하며 697만 명을 모아 흥행에 성공했다. 유쾌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머리 아픈 현실에서 오랜 만에 생각 없이 웃을 수 있다는 평을 받으며 크게 사랑받은 것이다.
‘귀향’은 위안부 할머니의 실화를 배경으로 그려낸 영화로, 유명배우들이 출연하지 않는다. ‘귀향’은 7만 5000여명의 후원인들이 크라우드 펀딩으로 만들어준 12억여 원으로 만든 작품으로, 60만 관객이 손익분기점이었다. 하지만 모든 관계자의 예상을 뛰어넘고 ‘귀향’은 358만 명을 모아 올해 개봉 영화 중 15위를 기록했다.
◇ 재개봉 영화는 ‘로맨스’ & ‘힐링’에 주목
작년에 이어 올해도 재개봉 열풍이었다. 특히 ‘노트북’ ‘500일의 썸머’ ‘비포선라이즈’와 같은 로맨스 영화에 관심이 집중됐다. 한국영화계에서는 ‘실종’에 가까운 로맨스가 과거의 명작들로 대체되는 모습이다. 이중 ‘노트북’은 18만 관객을 동원해 2016년 재개봉 영화 1위, 역대 재개봉 영화 2위(1위는 ‘이터널 선샤인’)를 차지했다. 오는 연말에도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시애틀의 잠 목 이루는 밤’과 같은 로맨스 영화가 개봉한다.
이외에도 ‘죽은 시인의 사회’ ‘굿윌헌팅’ ‘세얼간이’ 등 힐링영화들이 재개봉했고, ‘록키호러픽쳐쇼’ ‘유주얼서스펙트’ ‘매트릭스’과 같이 1975년작부터 1999년작들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보아도 촌스럽지 않은 고전들도 개봉했다. 또한 ‘인터스텔라’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등 개봉된지 오래되지 않은 블록버스터도 재개봉해 재관람 열풍에 합류했다. 이중 ‘세얼간이’는 개봉 당시에 잘렸던 30분간의 뮤직시퀀스가 그대로 살려져 있고,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는 흑백 버전으로 재개봉 한다.
◇ 올해의 신인, 김태리-김환희부터 연상호-윤가은 감독까지
올해는 신인들이 돋보이는 한 해였다. 2016년 유일한 천만 영화인 ‘부산행’은 실사 영화로는 신인인 연상호 감독이 해낸 업적이다. 다만 제37회 청룡영화상, 제36회 영평상 등 많은 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은 윤가은 감독에게 수상의 영광이 돌아갔다. 윤가은 감독은 초등학생 소녀들의 심리를 다룬 ‘우리들’로 전 세계 30개 이상의 유수 영화제에 초청되기도 했다.
신인 배우들도 강한 인상을 남기며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보여줬다. 첫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연기력과 강렬한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해낸 김태리와 김환희가 그 주인공이다. 다양한 시상식에서 신인여우상은 김태리가 수상을 많이 했지만, 고작 10대에 불과한 김환희가 쟁쟁한 후보들 사이에서 신인여우상 후보가 된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김민희, 하정우, 조진웅 등 쟁쟁한 선배들 사이에서도 뒤지지 않은 연기력을 선보인 김태리는 제37회 청룡영화상, 2016 여성영화인 축제 등에서 신인상을 수상하며 대중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다. 김환희는 ’뭣이 중헌디‘라는 대사로 2016년 대한민국 최고의 유행어를 만들기도 했으며, 최근엔 드라마 ’공항 가는 길‘에서도 활약하며 앞으로 행보에 대한 기대감을 주고 있다.
전자신문 엔터온뉴스 이주희 기자 leejh@entero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