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온뉴스 이주희 기자] 영화 ‘판도라’는 강진에 이어 원전까지, 예고 없이 찾아온 재난 속에서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 평범한 사람들이 나서는 이야기를 담은 내용으로, 배우 김남길은 철없어 보이지만 믿음직스러운 청년 재혁 역을 맡았다.
‘판도라’는 오랫동안 많은 이들의 손길로 만들어졌다. 그동안 이 영화는 투자가 어그러지기도 하면서 4년 만에 겨우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촬영을 시작한 것이 지난해 3월. 김남길은 초창기에 시나리오를 받고 이 과정들을 지켜봤다. 영화를 결정하면 적어도 3개월 이상은 한 작품에 매달려야 하기 때문에 배우들은 단순한 감정으로 작품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때문에 작품을 결정한 이후, 해당 작품의 촬영이 밀리는 것은 배우들에게 곤란한 일이다. 하지만 김남길은 물음표가 더 많았던, 이번 영화를 기약 없이 계속 기다렸다.
“투자가 된다고 했다가 안 된다고 했다가 하는 과정이 있었다. 나는 초창기에 시나리오를 받고 기다리고 있었다. 좋게 포장하고 싶지만, 들어온 다른 작품이 없었다.(웃음) 참고로 ‘살인자의 기억법’이나 ‘어느 날’은 그 다음에 결정된 작품이다. 우리집과 감독님 작업실이 가까워서 자주 만나서 시나리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촬영이 가능하다면 원전 재난을 어떻게 구현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했었다. ”
‘판도라’에는 무능한 대통령, 대통령을 조종하는 실세 총리, 윗사람의 명령에 따르느라 긴급한 상황에도 바보처럼 현장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관리자들 등 무력하게 등장한다. 사회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에 외압이 있지 않았냐는 우려를 받기도 했다.
“연륜이 많은 선배들이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냐고 물어보셨는데, 나는 거부 반응이 없었다. 콘트롤타워의 부재나 허술함은 다른 재난영화에도 나온다. 그것을 토대로 극대화 시켰고, 우리는 원전 문제니까 만약 이런 사건이 터지면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이건 콘트롤타워가 완벽해도 막을 수 없지 않나. 감독님은 ‘막을 수 없다’ 전제조건을 가지고, 미리 대비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자고 했고, 그래서 외압 걱정은 없었다.”
주연배우로 이 영화의 대표적인 얼굴을 맡는다는 것도 상당한 일인 데다가, 이번 영화는 김남길에게 단순히 ‘배우로서 연기만 한다’로 볼 수 있는 시간들이 아니었다. 그의 생각이 많이 반영됐든 안됐든 간에 김남길은 작품 전반에 참여해 연기자 그 이상의 역할을 했다.
“처음 들어갈 때보다 촬영하면서 의미는 더 많아졌다. 처음에는 원자력 발전소에게 인격을 줘서 한 캐릭터처럼 만들어보자는 설정도 있었다. 그런데 오글거려서 빼기로 했다.(웃음) 감독님도 사실적인 재난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다. 나 같은 경우엔 체르노빌 사건을 떠올렸다. 당시 냉각수가 새는 것을 알고도 투입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의 기사를 찾기도 했다. 사실 나는 더 과격하게 표현되길 바랐다. 내 기억 속에 있는 체르노빌에는 피난민이 두고 간 인형이 녹아내린 모습이 있었다. 황폐한 도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 공포스러운 이미지로 더 처절하고 무섭게 가자고 했었다. 그런데 감독님이 너무 이미지가 세면 무서워서 안 볼 수도 있다며, 그 상황을 보여주는 것보다 대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자고 했다.”
재난 상황, 생의 끝인 순간에는 사랑하는 가족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판도라’에서 구원자는 슈퍼히어로가 아니라 우리내 아버지와 형이었다. 재혁은 가족들과 갈등을 겪는 철없는 아들이었지만,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영웅이 되어 간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영웅이지만, 할리우드 영화처럼 엄지를 치켜들고 쿨한 느낌을 주는 영웅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거창하지 않다. 한국 정서를 담아 솔직하게 담아내자 싶었다. 멋들어지고 의연한 영웅이 아니라 호기로워 보이고 싶어 하지만 결국 울고 마는 인물이다.”
“감독님과 가족 이야기를 참 많이 했다. 가족들이 다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갈등이 있다.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돈이나 관계에서 엮이는 갈등이 있다. 감독님과 나는 서로 가족에 대한 뒷담화를 했다.(웃음) 내가 ‘우리 가족은 이랬다’고 하면, 감독님이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고 말하는 식이었다. 그래도 결론은 항상 좋게 마무리가 됐다. 그러다보니까 영화에 정서를 전달하는데 도움이 많이 됐다.”
대부분의 영화가 그렇지만, 재난 영화의 마지막 신은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큰 신이다. 이 장면에서 김남길은 혼자서 카메라를 장악한 후, 제대로 연기 혼을 펼쳐낸다.
“상대 배우를 앞에 두고 하지 않아 감정적으로 힘들기도 했고, 관객에게 잘 전달될 수 있을까 걱정됐다. 상황 자체에 대해 오랜 시간 고민을 많이 했다. 내가 죽는다면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 생각해봤다. 너무 외롭지 않을까 생각했고, 현실이라면 폭탄이 안 터지면 어떡하나 고민할 것 같기도 하다.”
“처음 대본을 봤을 때 마지막 신을 찍을 날이 많이 남아있으니까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남들도 걱정했지만 ‘걱정마, 내가 정서 전달해줄게’ 하고 자신했는데(웃음) 시간이 지날수록 부담이 됐다. 죽음에 관한 동영상을 많이 찾아보고 술도 마셔봤다. 현장에서 중압감을 느끼는 스타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작업복을 입는데 폐쇄공포증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얼굴이 붓고 체력적으로 떨어졌다. 촬영을 끝내고 나니 스태프들의 호불호가 갈렸다. 정말 미안했지만 더 이상 못할 것 같더라. 넋이 나갈 것 같았다. 우여곡절 끝에 한 번 더 촬영을 했다. 스태프들이 나보고 귀신들린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이게 사실적이지 않을까. 심리적으로 지쳐 있는 그 감정이 죽기 전 감정일 것 같았다. 남들도 나보고 ‘너 지금 죽어도 괜찮아’라고 했다. 그런데 감독님이 그걸 안 썼더라.(웃음) 사실적이긴 한데 15분짜리라서 러닝타임이 길어지고, 그 정도로 잘한 건 아니라고 하더라.(웃음) 대신 섞어서 쓰셨다.”
재난 블록버스터는 호불호가 갈리는 장르다. 거대한 스케일과 감동적인 드라마가 섞여 있어 좋아하는 관객도 있지만, 재난영화의 뻔한 공식 때문에 싫어하는 관객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의미 있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김남길이 시사회 현장에서 눈물을 흘렸던 이유와 같다.
“현실과 맞닿아 있어서 관객들이 영화를 본 후에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들 막걸리를 마시다가도 더 센 소주를 먹고 싶게 하는 기분을 만들어 준다. 그래서 더 많은 분들이 보셨으면 좋겠다. 공권력이나 제도로부터 보호를 받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능력으로 자신과 가족을 지켜야 하는 세상이다. 내가 시사회 때 울었는데, 그런 답답한 모습에 공감이 되어 눈물이 났다. 내 연기를 보고 운 것이 절대 아니다.(웃음) 관객들도 시원하게 울면서 답답한 현실을 해소할 수 있지 않을까.”
전자신문 엔터온뉴스 이주희 기자 leejh@entero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