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의 작품들을 보면 유독 여성 캐릭터에 눈길이 많이 간다. ‘올드보이’의 강혜정이 그러했으며, ‘공동경비구역 JSA’-‘친절한 금자씨’의 이영애,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임수정, ‘박쥐’의 김옥빈 등이 그랬다. 신작 ‘아가씨’에서도 김민희와 신인 김태리를 전면에 내세우며 자신만의 독특한 시선으로 여성 캐릭터를 그려냈다.
◇ ‘공동경비구역 JSA’-‘친절한 금자씨’, 이영애
이영애는 지난 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에 출연, 소피 소령 역을 맡았다. 소피 소령은 비무장지대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파견된 중립국 소속의 한국계 스위스인이다. 이영애의 제복 판타지는 남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그는 이 작품으로 세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이영애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 5년 뒤 ‘친절한 금자씨’로 박 감독과 인연을 이어갔다. 박 감독은 당시 ‘산소 같은 여인’으로 불렸던 이영애의 이미지를 비틀어 금자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금자는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버려야 했던 죄책감을 가지는 동시에 복수는 결코 구원이 될 수 없음을 아는 절망감을 가진 인물이다.
‘친절한 금자씨’는 ‘미모의 착한 여자가 처절한 복수를 시작한다’는 카피처럼 자신이 추락해가는 것을 의식하고 거기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이의 아름다움을 그린 작품으로, 복수에 포용 여지를 보여줬다. “너나 잘 하세요”라는 유행어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 ‘올드보이’, 강혜정
박 감독에게 ‘올드보이’를 빼놓을 수 없다. 2003년 개봉한 ‘올드보이’는 박찬욱이라는 이름 석 자를 세계 영화계에 알린 작품으로, 강혜정은 무려 300대 1이라는 오디션을 뚫고 여주인공 미도 역을 따냈다. 그는 여배우라면 꺼릴만한 상반신 노출을 감행하는 열정을 선보였다.
미도는 15년 세월을 감금방에서 보낸 오대수(최민식 분)에게 사랑의 아픔을 느끼게 하는 일식집 주방장이다. 두 사람의 사랑은 패륜의 길이다. 하지만 박 감독은 미도에게 ‘기억과 사랑’의 열쇠를 쥐어주며 이들의 사랑에 함부로 손가락질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배우들의 열연과 박 감독의 연출력이 합쳐져 ‘올드보이’는 2004년 제57회 칸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 강혜정도 이후 ‘연애의 목적’, ‘웰컴투 동막골’ 등으로 충무로에서 인정하는 여배우 반열에 올랐다.
◇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임수정
임수정은 2006년 개봉한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영군 역을 맡아 눈썹을 미는 등 여배우로서 파격 변신을 시도했다. 이 작품은 자신을 싸이보그라고 생각하는 영군과 남의 특징을 관찰한 후 훔치기를 잘 하는 남자 일순(정지훈 분)의 이야기를 담았다.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정상적이지 않은 이들이 만들어가는 개성 넘치며 따뜻한 이야기는 관객들의 공감대를 형성했다. 싸이보그는 밥을 먹으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점점 야위어가는 임수정의 독특한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복수 3부작’을 끝낸 박 감독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영군을 통해 그간 보여줬던 여성 캐릭터들 중 가장 밝고 순수한 인물을 그려냈다.
◇ ‘박쥐’, 김옥빈
‘박쥐’(2009)는 김옥빈이라는 배우를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린 작품이다. 데뷔작 ‘여고괴담4-목소리’ 이후 특별한 작품을 만나지 못했던 김옥빈에게 ‘박쥐’는 제62회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을 통해 국내를 넘어 해외까지 자신을 알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줬다.
박 감독에게 ‘올드보이’ 오디션 때 강혜정을 처음 만나서 느꼈던 감정을 다시금 느끼게 했던 김옥빈은 ‘박쥐’에서 신부인 남편의 친구와 바람을 핀다는 파격적인 설정 하에 설명적이지 않는 간결한 표정을 그려내며 호평을 얻었다.
신부를 욕망의 나락으로 떨어트릴 정도의 매력을 가진 여성 캐릭터는 기존의 청순하거나 엉뚱했던 박 감독의 여성 캐릭터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복수보다는 개인의 욕망에 초점을 맞춘 것도 그러했다.
◇ ‘아가씨’, 김민희-김태리
박 감독은 신작 ‘아가씨’의 주인공으로 김민희, 김태리를 선택했다. 이 중 눈에 띠는 것은 그가 1500여 명의 후보 중에 신인인 김태리를 캐스팅한 것이다. 때로는 순수하고 때로는 당돌한 하녀 캐릭터를 생동감 넘치게 그려낸 김태리의 모습은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으며, 이러한 현상은 여러 작품이나 광고계의 관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김민희 또한 완벽한 일본어 연기와 좌중을 압도하는 장악력으로 호평을 받고 있다. 그는 데뷔 이래 가장 파격적인 ‘동성애’라는 소재를 만나 자신이 가진 끼를 마음껏 발산했다. 우아한 기품을 발산하는 그의 매혹적인 비주얼은 절로 감탄을 자아낸다.
‘아가씨’ 속 히데코(김민희 분)는 코우즈키(조진웅 분)의 변태적인 훈육 속에, 숙희는 일제 강점기 식민지 조선의 하층민이다. 두 사람 모두 ‘억압’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으며, 서로에 대한 비밀을 알아가며 동질감을 넘어선 감정을 공유하게 된다. 결국 이들이 탈출의 수단으로 선택한 것은 ‘사랑’이다. 남성성에 억압받은 여성들이 서로를 사랑하게 되며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어 간다는 독특한 사고가 담겨 있다.
박 감독의 작품들에서 여성 캐릭터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그는 보통의 삶이 아닌 꼬일 대로 꼬인 삶을 살아가는 여인들의 모습을 통해 관객들에게 메시지를 주고자 했다. 독특한 시선으로 여성을 바라보는 그가 다음에는 어떤 여배우에게 시선을 돌릴지 궁금증을 더한다.
조정원 기자 jwch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