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액 삭감이 예고되던 정부 반도체·디스플레이 분야 연구개발(R&D) 예산이 기사회생했다. 산업통상자원부, 미래창조과학부가 R&D 예산 삭감에 따른 산업계와 학계의 우려를 받아들여 내년도 예산도 예년처럼 편성하기로 합의했다.
13일 산업부와 미래부는 최근 논란이 된 반도체·디스플레이 R&D 예산 삭감안을 폐기하고 구체화한 예산안을 공동 기획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당초 미래부는 정보통신진흥기금에서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R&D 예산을 배정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산업계와 학계의 반대 여론이 고조되는 데다 두 산업이 국가 경제에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전문가 견해가 잇따르자 기존의 결정을 원점으로 돌렸다.
이 과정에서 주형환 산업부 장관과 최양희 미래부 장관이 직접 만나 의견 절충을 본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예산 규모는 전년보다 줄어들 수도 있다는 것이 산업계와 학계의 전망이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R&D 예산은 `전자정보디바이스사업`에서 나온다. 전자정보디바이스 사업 예산은 정보통신진흥기금(정진금)에서 지원된다. 정진금은 정부와 기간통신사업자의 출연금, 주파수 할당 대가, 사용료 등으로 마련된다.
미래부가 정진금에서 전자정보디바이스사업 예산을 배정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린 근거는 반도체·디스플레이 R&D 예산을 정보통신 분야 진흥을 위해 마련한 기금에서 떼어내 주는 것이 맞지 않다는 것이었다. 두 산업의 경쟁력이 세계 수준으로 높은 만큼 정부 R&D 예산을 투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산업부가 관할하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분야에 예산을 배정하지 않으면 미래부의 신규 과제에 더 많은 지원을 할 수 있는 점도 작용했다.
정진금은 1995년 제정된 정보화촉진기본법을 근거로 조성된다. 과거에는 정보통신부가 정진금 조성과 집행을 담당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로 접어들면서 정통부가 폐지됐고, 기금 집행은 지식경제부(현 산업부)가 맡았다. 박근혜 정부 들어 기금 집행은 다시 신설된 미래부가 맡게 됐다. 기금 집행처가 바뀌면서 산업부는 미래부로부터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R&D 예산을 타다 썼다. 미래부는 예산을 계속 삭감했다. 당장 올해는 매년 200억원가량 배정하던 신규 사업 예산이 전혀 없다. 내년에는 계속과제 예산도 책정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산업부 관계자는 “반도체 등 R&D에 정부 예산이 한 푼도 안 들어가는 초유의 사태는 막았다”고 말했다.
산업계 관계자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는 정보통신산업의 뿌리로, 정진금과 연관이 없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면서 “해당 분야의 경쟁력이 높다는 것은 대기업에 한정된 얘기이지 중소·중견기업에는 아직도 정부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학계 관계자는 “R&D 제로 예산은 막았지만 이 소동이 벌어지기까지 일반회계 예산 편성 등 아무런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한 산업부의 잘못이 적지 않다”면서 “중국은 이 분야의 예산을 너무 쏟아부어서 각국이 난리인데 한국은 정반대로 가고 있어 장래가 걱정된다”고 꼬집었다.
〃 전자정보디바이스사업 연간 예산(자료 산업부)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