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 업계가 침체의 늪에 빠진 이유가 원전 내부 문제가 아닌 정부 정책 실패와 같은 외부 환경 탓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국내 경제 발전에 원동력으로 수십 년간 고생해온 원자력 업계가 한순간에 비리 온상으로 전락했다는 것에 원로들이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2014 세계 원자력 및 방사선 엑스포 기간 중 열린 ‘제39차 원자력 원로포럼’에서는 최근 원자력 업계의 날개 없는 추락의 원인을 정부 정책 부재에서 찾았다. 지난해부터 잇달아 터진 원전 비리와 원자력 마피아론은 원전에 대한 국민 신뢰도를 바닥까지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방향성 잃은 원전 정책
원로 포럼에서 원자력 산업 문제는 정부 정책 실패로 귀결됐다. 현재 원자력 산업은 분야별로 정책결정기구와 주관부처, 담당 기관이 제각각이다.
원자력 발전산업은 산업통상자원부가 주관하고 한국전력과 한국수력원자력 등이 담당한다. 최고 정책결정은 국가에너지위원회가 하며 대통령이 수장이다.
원자력 중장기 정책과 기초 연구는 미래창조과학부 소관이다. 원자력연구원이 실제 연구를 맡고 국무총리가 위원장인 원자력진흥위원회가 정책을 결정한다.
원자력 안전규제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안전규제는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정책 결정도 하고 주관도 한다. 실행만 원자력안전기술원과 한국원자력통제기술이 맡을 뿐이다. 하지만 위원장이 차관급이라 나머지 위원회에 비해 소위 ‘격’이 떨어진다. 결국 수장 직급으로 중요도를 따지면 원전산업과 원자력 연구, 안전규제 순인 셈이다.
연구개발 분야는 더 심각하다. 당초 원자력연구소의 얼마 되지 않은 인력을 쪼개 세 곳으로 나눠놓았다. 한전 전력연구원과 한수원 중앙연구원, 원자력연구원이다. 한 데 모여 있어도 어려운 연구개발 업무를 찢어 놓으니 어느 한 곳이라도 제대로 되는 곳이 없다고 원로들은 입을 모았다. 게다가 상호 협력체계도 갖추지 않고 있어 신형 원자로 개발은 커녕 시너지조차도 기대하기도 힘들다.
반면 미국 웨스팅하우스에서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원자로 냉각 방식을 완전히 뜯어 고친 신형 원자로를 선보였다. 중국과 미국에서 각각 4기가 건설 중이다.
원전 사업자가 한수원 한 곳이서 발생하는 한수원과 협력업체간의 갑과 을 관계도 문제라는 지적이다. 원전 관련 기업은 한수원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는 구조라 납품 비리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신재인 한국핵융합·가속기기술진흥협회장은 “지식경제부나 산업통상자원부 등 과거 동력자원부 이후 에너지가 정부부처 이름에서 빠졌다”며 “이는 정부에서 에너지를 비중 있게 다루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연구·인증 시스템이 무너졌다
원자력 정책이 방향을 잃자 시스템도 무너졌다는 평가다.
예를 들어 전선이나 밸브 등 원전용 부품 인증을 받으려 해도 국내서는 받을 곳이 없다. 물론 국내 기관의 수준은 높지만 국제적으로 인증을 받지 못했을 뿐이다. 때문에 국내 업체는 원전에 납품하기 위해 돈과 시간을 들여 해외까지 가야 한다. 한데 원전 정비에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다. 여름이나 겨울 피크에 앞서 정비를 끝내야 하기 때문이다. 부품 인증 비리가 발생한 이유다.
한 참석자는 “정부에서는 여건도 안 되는데 시한만 정해주고 강요한다”며 “이러한 상명하복식 구조가 원전비리를 유발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노후화된 부품을 교체하려 해도 문제다. 이미 수십 년 전에 납품한 부품의 공급업체가 사라진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미리 확인해서 국산화를 시켜놓아야 하는데 연구인력이 분산돼 있으니 이마저도 어렵다고 신 회장은 주장했다. 민간 기업인 두산중공업도 연구인력이 부족하긴 마찬가지다.
신 회장은 “원전 문제 핵심은 원전용 부품 생산 이후 품질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비리 관련자를 처벌하는 데 급급할 게 아니라 품질관리를 한수원 사장 직속으로 두고 철저하게 검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책과 연구 총괄기구 설립 시급
원로들은 해법으로 막강한 기능을 가진 컨트롤타워를 제시했다. 과거 원자력위원회의 부활이다. 수장은 대통령이 돼야 한다.
참석자 모두 우리나라 인구당 에너지 소모량이 세계적인 수준인데도 이를 전담하는 부처가 없다는 것에 대해 지적했다. 별도 부처를 두거나 현재 원자력 산업 진흥과 안전규제로 나뉜 위원회를 예전처럼 하나로 묶어야 한다는 것이다.
연구 인력도 기초연구와 활용 분야, 연료 모두를 합쳐야 한다. 대신 산업부나 미래부 모두 활용할 수 있는 독립기관으로 존재해야 한다.
원전의 수출산업화를 위해 민간 참여도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현재 공기업인 한전 주도의 원전 수출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민간이 공기업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다. 삼성이나 SK 등 주요 건설사나 두산중공업 등 기기 제작업체가 공격적으로 수출을 추진해야 가능성을 그나마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이나 미국은 미쓰비시나 도시바, 웨스팅하우스 등 자국 내 대기업이 전면에 나서고 정부가 뒷받침 하는 형태로 수출 전략을 짠다.
신 회장은 “국내 원자력 산업은 방향성 상실로 국민 신뢰가 밑바닥으로 떨어졌지만 위기는 원자력 기술능력이 크게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다”며 “이를 위해서는 원자력 분야 산학연 공동협력과 함께 정부의 원자력 행정조직 개편, 명확한 정책방향 수립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유창선기자 yuda@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