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 통합·혁신 시급
KB국민은행 주전산기 교체 갈등이 4일 지주회장과 은행장 ‘중징계’라는 초유의 사태로 일단락됐다. 이건호 국민은행장은 ‘이사회에 거취를 맡기겠다’고 강경발언을 한지 4일 만에 ‘사퇴’하는 불명예를 안았다. 승자는 없고 패자만 있는 ‘KB금융 최악의 날’을 맞았다. KB금융그룹은 물론이고 국민은행, 일선 계열사 직원들은 ‘패닉’ 상태다.
당초 중징계 사전 통보를 받았던 두 사람은 금감원 제재심의위원회의 경징계 의견으로 기사회생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날 중징계 결정에 이은 이 행장의 퇴진으로 조기에 조직 안정화를 꾀하려던 계획에는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임 회장, 동반사퇴 사실상 거부
이 행장이 전격 사임하자 임영록 KB금융그룹 회장 거취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집안싸움을 촉발한 갈등 유발자 모두 용퇴해야 마땅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최수현 금감원장은 이날 지주와 은행 이사회 의장을 직접 만나 “경영 안정에 최선을 다해 달라”는 말을 전했다. 이는 두 수장의 퇴진을 이끌어달라는 의미로도 풀이됐다. 이에 앞서 금감원은 지주 회장의 제재 수위를 두고 금융위와 사전 교감을 가졌다. 어느 정도 중징계 확정에 자신감을 내비친 것으로 동반 사퇴로 마무리하고자 하는 의지로 보인다.
반면 임 회장은 내부 수습과 조직 쇄신에 직접 나설 것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했다. KB금융지주는 이날 보도자료를 내고 조직안정화와 경영정상화를 위해 이사회를 중심으로 비상경영체제를 가동하겠다고 밝혔다. 또 명예회복을 위해 주전산기 교체와 관련한 진실 규명에도 나서겠다는 입장을 덧붙였다.
동반 사퇴를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공식화한 것으로 풀이된다.
일각에서는 내분의 당사자였던 이가 남아서 재봉합의 주체가 된다면 한쪽에만 면죄부를 주는 것이라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금감원, 왜 중징계로 결론 뒤집었나
최수현 금융감독원장은 브리핑을 통해 임 회장과 이 행장 두 사람 모두에게 중징계인 ‘문책경고’ 결정을 설명했다. 그는 이미 경징계로 제재가 경감한 상황에서 관례를 깨고, 중징계 처분을 내렸다.
금융권에서는 최 원장이 경징계를 유지하면서 경고성 발언을 추가하는 데 그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하지만 최 원장은 장고 끝에 중징계 카드를 뽑아들었다.
최 원장은 우선 “국민은행 주전산기 전환사업과 그에 따른 리스크에 대해 여러차례 보고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직무상 위법·부당행위에 대한 감독의무를 소홀히 했다”고 지적했다. 또 “회장과 행장이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조직 내부는 물론이고 금융권 전반에 신뢰를 떨어뜨렸다”는 점도 직시했다.
그동안 KB 제재 결정이 지연되면서 금감원은 검사 능력을 의심받고 감사원 등 외부에 흔들린다는 인상을 줬다.
이날 최 금감원장의 중징계 전환은 금융당국의 위상을 높이고 금융권의 안정과 선진화를 위해서는 양보가 없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평가된다.
제재심의위에 대한 역할 재정립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 현재 제재심의위는 원장의 자문기구 역할만 한다. 이를 의결기구로 전환하는 등 금융당국 제재시스템 전반의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KB금융 조직 내부 달래기가 우선
은행장 사임으로 주전산기 교체 내분 문제는 일단락되는 분위기다. 하지만 떨어질 데로 떨어진 KB의 이미지 훼손과 관치금융으로 얼룩진 내부 인사 대립, 조직원의 사기저하는 회생자체가 불가능한 상황까지 직면했다.
당장 이건호 행장의 사퇴로 국민은행은 ‘경영 공백’이 불가피하다. 행장 대행을 맡을 것으로 보이는 박지우 부행장은 “지금으로선 어떠한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국민은행 내부 조직 봉합과 정상화를 위해 남은 경영진들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권에서는 이제부터라도 KB금융그룹의 조직 대수술을 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번 주전산기 교체 갈등 문제의 원인은 임 회장과 이회장간 인사권 문제가 발단이 됐다. 소위 ‘라인’을 만들어 서열싸움을 벌이고, 비정상적인 인사 파행이 계속되는 한 제 2, 3의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은행권 고위 관계자는 “주전산기 사태의 징계 과정을 보면, 금융당국이나 지주사, 은행 모두 여론에 편승해 눈치를 보는 말도 안되는 상황이 계속 벌어졌다”고 지적했다.
길재식기자 osolgil@etnews.com, 김승규기자 seu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