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은 꿈으로 추진할 수 없습니다. 눈은 멀리 봐도 다리는 땅에 붙이고 가야 하죠. 그림자는 짧게 남기되 가끔 살펴봐야 합니다. 그래야 정책이 튼튼해집니다.”

지난해 유독 뜨거웠던 경제민주화 열기로 공정거래위원회는 집중 조명을 받았다. 공정위에 기대하는 게 많았던 만큼 국민 비판도 거셌다. 작년 4월 취임한 노대래 공정거래위원장은 기대와 비판에 휘둘리지 않고 ‘할 일’을 묵묵히 수행했고, 세간 평가는 1년 사이 많이 바뀌었다. 노 위원장은 철저히 현실에 입각해 주어진 과제 해결에 최선을 다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설명했다.
공정위는 지난해 일감 몰아주기 규제, 신규순환출자 금지 등 굵직한 숙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해결 과제는 여전히 산적한 상황이다. 경제민주화 실현과 규제개혁, 특허괴물 규제와 대기업집단 불공정거래 감시 등이 바로 그것이다. 공정위 활약에 거는 국민 기대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고, 노 위원장 발걸음은 더욱 분주해졌다.
노대래 위원장을 만나 지난 1년 동안 성과와 소회, 앞으로 정책 방향을 들어봤다.
-취임 후 지난 1년 동안의 주요 성과를 꼽는다면.
△일감 몰아주기 규제, 신규순환출자 금지 등 양대 핵심법안을 포함해 총 8개 입법과제를 완료한 게 가장 큰 성과다. 특허권·신기술 남용, 소프트웨어(SW) 분야 기술·인력 유용 등의 문제에도 신경을 썼다.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에 경쟁챕터를 신설하는 등 해외에 진출하는 우리 기업을 위한 가드(guard) 역할을 한 점도 큰 성과로, 앞으로 계속 발전시켜 나갈 방침이다.
-최근 주목하는 대기업 움직임이 있다면. 또한 일감 몰아주기 규제 후 대기업 움직임에 변화가 있었는지.
△일부 대기업의 지배구조에 변화가 있는 것 같다. 대기업이 경영권을 승계하는 과정에서 법을 어기는 부분이 없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다.
일감 몰아주기 관련 개정 법률은 시행된 지 3개월여밖에 지나지 않았다. 또 종전 진행 중인 거래는 향후 1년간 적용을 유예해 효과를 논하기에는 다소 이른 감이 있다. 하지만 작년 말 점검 결과 대기업 일감 몰아주기 관행이 다소 개선된 것으로 나타났다. 대기업도 일감 몰아주기가 잘못됐다는 인식을 갖기 시작했다.
새로 도입한 제도를 효과적으로 집행하기 위해서는 조직·인력 등 집행력 보강이 필요하다. 특히 총수일가 사익편취 규율 집행과 최근 급증하는 신고사건의 처리 등을 위해 인력을 보강해야 한다. 이와 관련 안전행정부와 긴밀히 협의 중이다.
-공정위가 일감 몰아주기를 이유로 SK그룹 계열사에 과징금을 부과한 것과 관련 서울고등법원이 SK 측 손을 들어줬다.
△인건비·유지보수비 정상가격에 대한 법원의 이해가 부족했다. 서울고법이 기준으로 삼은 고시가격보다 실제 시장에서 거래되는 정상가격은 크게 낮은 수준이다. 정상가격은 통상적으로 시장에서 거래되는 가격으로, 우리는 고시가격보다 20% 낮은 수준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법원은 고시가격 이하면 정상가격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온라인 쇼핑몰, 소셜커머스 대상 불공정거래 감시는 어떻게 진행하고 있나.
△스마트기기를 활용한 모바일 전자상거래, 소셜커머스 시장 성장이 두드러지는 추세다. 모바일 거래 시 업체가 유의해야 할 사항을 상반기 중 제공해 자율적인 법 준수 문화가 확산되도록 할 예정이다. 작년 마련한 소셜커머스 소비자보호 자율준수가이드라인을 잘 지키고 있는지 실태 점검에도 나선다. 하반기에는 지난 4월 시행된 상품정보제공 개정 고시 이행 여부를 점검하고 위반사항을 시정조치 하겠다.
-일반지주회사의 금융계열사 허용 요구 여론이 많다. 공정위 입장은 무엇인가.
△공정거래법상 일반지주회사의 금융사 보유는 금지됐다. 이론적으로 금산분리 원칙에 부합하지만 현실은 이 같은 규정에도 불구하고 대기업집단의 금융과 산업부문 간 교차·순환출자로 복잡하게 얽혀있다. 금산복합형태를 바꿀 특별한 유인이 없고, 지주회사체제로 전환하려 해도 금융사를 자회사로 편입시킬 수 없다. 지주회사로 전환한 대기업집단도 총수일가 등이 지주회사 체제 밖에서 금융사를 직접 지배하는 형태로 보유하고 있는 상황이다.
대기업집단이 소유구조 개선에 활용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이 필요하다. 총수가 복잡한 교차·순환출자로 금융사를 지배하기보다 지주회사체제 내에서 금융·비금융이 분리되고 수직적 출자만 허용된 투명한 소유구조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금융부문 비중이 크다면 중간금융지주회사 설치를 의무화 해 건전성 감독을 강화해야 한다.
-최근 대기업 계열 시스템통합(SI) 업체의 불공정 하도급 거래를 제재했다. 소프트웨어(SW) 부문 불공정거래 감시 진행 현황은 어떠한가.
△앞으로는 중견 SI 기업의 불공정거래행위에도 한층 관심을 기울여 감시를 강화할 계획이다. 대기업의 공공사업 참여 제한 이후 중견기업 횡포에 대한 고충이 많이 제기됐다.
SW 관련 공개·비공개 간담회를 지속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지난 2월 SW 벤처·중소기업 간담회를 열었고, 분기마다 개최할 계획이다. 부당특약 금지 등 최근 도입한 제도의 작동실태를 점검하는 작업도 SW 등 IT 업종을 대상으로 추진한다.
SW 등 최근 급격히 발전한 일부 분야가 하도급법 적용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개선방안 검토를 위한 연구용역에 나서는 등 제도 차원의 보완 작업도 병행 추진 중이다.
-IT 부문에서 주목하는 불공정 하도급 거래가 있다면.
△건설, 제조업과 달리 IT 업종은 무형물을 목적물로 하는 특성 때문에 불공정 하도급거래 행위가 빈번히 발생한다. 한 예로 발주자가 SW 사양을 정하지 않거나 계약서를 사전에 작성·교부하지 않은 채 작업을 지시하는 경우가 많다. 이 같은 행위로부터 중소사업자가 법의 보호를 제대로 받을 수 있도록 관련 업계 현황, 거래구조를 파악·분석하겠다. 이를 통해 ‘용역 위탁 중 역무의 범위 고시’상 누락된 업종을 추가하는 등 관련 고시를 정비할 계획이다.
-특허관리전문회사(NPE) 등장으로 글로벌 기업의 지식재산권 남용 우려가 커지고 있다. 공정위 정책 방향은 무엇인가.
△NPE는 개인과 중소기업의 발명·특허를 장려하고 지식재산의 자본화·유동화를 촉진하는 순기능이 있다. 하지만 과도하게 특허소송을 제기하고 이를 토대로 막대한 로열티를 요구하거나, 특정회사의 특허 이용을 거부하는 등 특허권을 부당하게 행사할 우려도 있다. 역기능은 시장 경쟁을 제한하고 해당 특허에 기반한 새로운 기술·상품 출현을 억제할 수 있어 적절한 규율이 필요하다.
NPE의 순기능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특허권 남용에 따른 경쟁배제 효과를 최소화할 수 있는 합리적인 규율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다만 NPE는 새로운 문제로 규율하기 위한 통일된 국제기준이 정립돼 있지 않은 상황이다. 이를 고려해 해외동향 분석, 관련업계 의견청취, 지재권 전문가 자문, 특허청 등 관계부처와의 협의로 다양한 의견을 수렴할 예정이다.
-특허를 보호하는 동시에 지식재산권 남용을 규제한다는 공정위 입장은 모순된 게 아닌지.
△지식재산권 남용 제한을 규제라고 보는 시각은 잘못됐다. 창조경제를 위해 특허 출원은 당연히 많아져야 한다. 이 부분은 공정위 영역이 아니다. 하지만 특허가 글로벌 플레이어 수준까지 도달하면 특허권 남용이나 특허권간 이해 충돌 문제가 현실로 대두된다. 이 단계에서는 글로벌 표준에 맞게 독점화를 막아야 한다. 경쟁정책 차원의 판단이 필요한 것이다.
특허권 남용, 독점화 기도에 대한 경쟁법 적용 사례는 미국·유럽연합(EU) 등 선진국에서 수시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중국도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규제개혁 작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시장상황과 맞지 않은 규제를 개선할 계획이다. 공정거래법이 도입된지 30년 지나면서 현실과 어긋나는 규제가 생겼다. 특히 숫자로 기준이 만들어진 것은 가급적 검토하도록 했다. 숫자를 빼고 기준만 만들어 구체적인 사안은 심결을 통해 상황변화를 고려해 판단하도록 할 것이다. 대기업집단 공시도 개선이 필요하다. 공시가 개별적으로 이뤄지니 국민 입장에서 제대로 알기 힘들고, 해당 기업도 자주 거론되니 부담스럽다.
-공정위 대상 소송을 기존 2심제에서 3심제로 바꾸는 법안이 발의됐다. 공정위 입장은 무엇인가.
△심급 확대는 소송 장기화가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 법적 불확실성이 장기간 지속되고, 기업 구조조정이나 경쟁질서 회복이 지연되는 등 경제적 폐해가 우려된다. 소송 기간이 길어지면 경쟁법 위반으로 피해를 입은 중소기업이나 소비자 구제가 지연돼 경제적 약자의 존립기반이 취약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공정위가 엄격한 대심구조 하에서 1심 역할을 하므로, 심급 확대 시 사실상 4심제가 되는 셈이다. 심급 확대보다는 대심구조를 강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를 위해 사건처리절차 법제화, 심의속개제, 반론권 강화 등 피심인 항변권 보장 강화를 지속 추진할 계획이다.
-최근 중국 경쟁당국이 공정위를 방문했다. 중국에 우리 경쟁법 집행 경험을 많이 전수할수록 중국에 진출한 우리 기업이 힘들어지는 것은 아닌지.
△국가별 경쟁법 위반기준과 집행 방식 등의 차이가 크면 기업의 법 준수 비용이 높아지고 기업경쟁력은 약화된다. 향후 중국을 포함해 글로벌 차원의 경제교류가 확대될수록 경쟁법 제도·집행 수준을 수렴시켜 나가는 게 기업활동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중국은 경쟁법 집행 초기단계로, 경쟁법의 기본 요소라 할 수 있는 투명성·방어권보장·비차별성 등이 아직 갖춰지지 않았다. 우리 경험 전수 등을 통해 이를 보완한다면 중국에 진출한 우리 기업 활동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한중 FTA 협상에서도 이 같은 사항을 반영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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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권상희 정책팀장(부장) shkwon@etnews.com
사진=박지호기자 jihopress@etnews.com
유선일기자 ysi@et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