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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경영학도의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가 요사이 화제다. 철도 민영화, 대규모 직위해제, 밀양 송전탑, 해고노동자, 비정규직, 88만원 세대, 정치적 무관심, 자기 합리화 등이 대자보의 주요 키워드다. 사회 문제에 대한 학우들의 관심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두 장의 손글씨 대자보가 가져 온 반향은 예상외로 크다. 소셜 네트워크서비스(SNS)가 학교담장 밖으로 대자보를 퍼 날랐다. 30만 누리꾼이 페이스북 `좋아요`를 눌렀다. 전국 대학에서 그에 화답하는, 자성의 목소리가 담은 또 다른 대자보들을 내걸었다. 이 같은 반향은 현재 진행형이다.

보수 언론은 대자보 내용을 `틀린 팩트에 근거한 선동`으로 규정했다. 일간베스트 회원은 `학교망신`이라며 대자보를 찢고 인증샷을 찍어 올렸다. 정치인들은 라디오 방송에 나와 자신의 정치활동에 대자보 내용을 끼워 맞춰가며 `옳다` `그르다` 말다툼을 벌인다. 한마디로 호들갑이다.

대자보는 말 그대로 대자보일 뿐이다. 여러 대학에 나붙고 있는 대자보를 보며 문화혁명에 힘을 실어줬던 1966년 베이징대학 대자보나 광우병을 빌미로 2008년 번졌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를 떠올린다면 그 역시 오버센스다.

대자보 확산에 동참하는 대학생들을 용자(勇者)로 치켜세우고, 4·19 학생운동이나 6월 항쟁을 주도한 것도 다름 아닌 대학생이라는 말로 그들을 사회개혁 전선의 첨병에 세우려는 기성세대가 있다면 참으로 비겁한 행동이다. 번지수가 틀려도 한참 틀렸다. 일련의 대자보 릴레이는 그간 지나칠 정도로 사회문제에 무관심하거나 내 일과 상관없다며 방관해온 보편적 대학생의 자기반성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고대생의 대자보 열풍이 거세지는 가운데 경북대 경영학도의 대자보가 붙었다. 앞서 본 대자보와는 정반대의 내용이다. 철도노조파업을 지지하지 않는, 밀양송전탑 건설에 찬성하는, 제주 해군기지 건설에 찬성하는 대학생이라고 해서 의식이 깨어있지 않다며 비방해선 안 된다고 적었다. 국정원 해체가 정답인가 물었다. 귀족노조 편들지 말고 교내 비정규직 청소부 어머니 어깨를 주물러 주라고 했다. 그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의식은 한 방향으로만 깨는 것이 아니다.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배척돼선 안 된다. 논쟁은 하되 비방은 금물이다. 사회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토론할 수 있는 권리는 대학생이 가진 특권이요, 지성의 요람인 대학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다.

대자보를 쓴 학생이 진보신당 당원이어도, 일베 회원이어도 상관없다. 즐비한 대자보를 배경으로 성지 순회하듯 인증샷 찍기에 여념이 없는 대학생, 몰래 대자보를 훼손했다며 우쭐해 하는 개념 없는 대학생만 아니면 된다. 익명의 기둥 뒤에 숨지 않고 아고라로 뛰쳐나와 자신의 의사를 실명으로 전달하려는 노력 자체가 발전이다. 방관자로 과소평가되던 대학생들의 진화 노력이다.

대자보에 등장하진 않았지만 비정규직 범위에도 들지 못하는 시간강사들의 비애, 공수표로 전락한 대선주자들의 반값 등록금 공약, 비싼 수업료를 내고도 원하는 강의를 들을 수 없는 불합리한 수강 시스템 등 이 시대 대학생이 고민해야 할 학내 문제도 너무나 많다. 기성세대 입장에서 그저 미안한 마음뿐이다. 작금의 대자보 사태를 화석화된 대학생들이 무관심의 껍데기를 깨고 탈바꿈하려는 순수한 노력으로 이해하고 싶다.


최정훈 취재담당 부국장 jhchoi@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