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현실적이고 이성적인 규제

정책과 법을 만드는 이들에게 완벽함을 요구할 수는 없다. 제도는 뒤늦게 현실을 따라갈 수밖에 없고, 또한 100% 현실을 반영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최대한 근접해야만 하는 것이 명백한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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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임시국회에 상정된 경제민주화 법안들을 놓고 여야 정치권이 달려드는 모습을 보면 우려스럽기 그지 없다. 경제민주화는 시대를 거슬러도 변치 않을 가치임에 분명하다. 박근혜 정부가 기치로 내건 창조경제의 전제 조건이자 5년의 운을 가늠할 최대 숙제이기도 하다. 갑의 횡포를 막기 위해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는 반드시 마련해야 하고, 그것이 이번 임시국회에 넘겨진 공이다. 남양유업 사태가 터지면서야 불거졌지만 수많은 자영업자들의 열악한 실태를 개선하는 일은 대표적으로 시급한 과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불공정 거래 관행을 뜯어 고치자며 정치권에서 터져 나오는 상당수 목소리들은 현실에 발을 딛지 않고 있다는 느낌이다. 대다수 국민들이 속해 있는 소위 `을`들을 볼모삼아 정치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정략으로 활용하려는 의도가 짙어 보인다. 정치권내에서조차 과잉 입법과 포퓰리즘 논란이 불거지는 배경이다.

우리 경제의 주력 산업인 첨단 제조업을 보자. 지금 정치권과 정부가 들이대려는 경제민주화의 잣대들이 과연 현실 가능한 일인지부터 의구심이 든다.

대표적인 불공정 거래 관행으로 꼽히는 납품단가 후려치기와 재고 떠넘기기만 해도 그렇다. 지난 4월 국회에서 처리된 하도급법 개정안은 부당 단가인하 등에 대해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적용한다고 했다. 수많은 국내 중소 제조기업들은 삼성·LG·현대차 등 굴지의 대기업 협력사로 살아간다. 혹독한 납품단가 후려치기에 몸살을 앓는 그들이지만 감히 손해배상을 해달라고 어느 누가 목소리를 높일 수 있겠는가.

회사 문을 닫더라도 이번에는 제값을 받겠다고 나설 경영자는 현실에는 없다. 수시로 떠안는 재고 물량이 적지 않은 부담이지만, 몇 푼 적자를 감수할지언정 역시 손해배상을 요구할 수도 없다. 대기업 입장에서는 어떤 명분을 내걸고라도 괘씸죄를 걸어 거래를 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협력사들이 거의 `쪼그려뛰기` 수준인 납품단가 후려치기와 재고 떠넘기기를 감내하는 이유다. 을인 1차 협력사들에 의지해 사는 2,3차 협력사들은 사정이 더 열악하다. 1차 협력사들이 느끼는 대기업의 횡포보다 2,3차 협력사들이 을로부터 받는 압박의 강도는 더할 수밖에 없다.

단가 후려치기도 거꾸로 생각해보자. 지나친 도가 문제지만 제조업에서 단가인하는 중소기업들의 체력을 단련시켜왔다. 원가 경쟁력을 지속적으로 높여가는 노력을 통해 이제 글로벌 수준의 중소기업들도 많이 등장했다. 제조업을 영위하는 한 단가 후려치기는 어쩌면 숙명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불공정거래를 규제하지 말자거나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규제는 현실적이고 이성적이어야 한다. 산업마다 먹이사슬 구조도 다르다. 지금 마치 여론몰이처럼 쏟아지는 경제민주화의 수단들은 상당 부분 현실과 괴리가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산업 현장에서 피부로 체감할 수 있는 실효성도 의문이다.

부작용을 더 많이 양산하거나 거창한 구호로 섣부른 기대만 갖게 할 정책들이 나올 수 있다는 얘기다. 정치권과 정부는 경제민주화 관련 법을 구체화하고 시행하는 과정에서 현실에 보다 천착하길 바란다.


서한 소재부품산업부장 hse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