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세의 디자인스토리]<28> 의인의 뜻을 전하는 CI

이야기는 193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야기는 한 소아과 의사의 숭고한 뜻에서 시작한다. 그는 모유와 우유 속 유당성분을 소화하지 못하는 유당불내증과 우유 알레르기로 힘들어 하는 어린 아이들을 보면서 의사로서 사명감에 고민을 시작했다.

그는 오랜 시간이 지나 병명과 원인이 밝혀진 후에야 유당을 함유하지 않으면서도 3대 영양소가 균형있게 들어간 유아용 대체식을 개발할 수 있었다. 이는 콩을 오랜 기간 연구하면서 두유의 대명사인 `베지밀`을 세상에 내놓은 정식품 창업주 정재원 명예회장의 이야기이다.

콩 단백질을 비롯해 여러가지 성분들이 새롭게 조명받으면서 두유가 시작된 동양 뿐 아니라 서양 여러 나라에서도 심도있는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베지밀은 1968년에 `정 소아과`에서 가내수공업으로 출시된 이후 40여년간 국제식품학술대회 등에서 홀로 두유의 이점에 대해 외쳐왔다. 이제는 공감하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두유 상품이 황금기를 맞았다.

하지만 동시에 정성수 회장의 고민이 시작됐다. 각종 유업을 비롯한 음료 대기업까지 두유시장에 발을 들이면서 프로모션과 판촉비용이 과도하게 지출됐다. 국내 최초 두유인 베지밀이라는 브랜드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정작 유당을 소화시키지 못해 구토, 설사로 영양실조에 걸린 아기들을 살리기 위해 시작된 정식품의 뜻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정 회장은 사업다각화로 몸집을 불리기보다는 국민건강에 기여한다는 창업 이념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2011년 서울 사무소를 사업의 모태였던 남대문시장 인근 `정 소아과` 자리로 이전하고, 지난해에만 두유 신제품 23종을 출시했다. 초심으로 돌아가고자는 뜻을 널리 알리기 위해 나에게 CI 리뉴얼을 부탁했다.

디자이너들은 적극적으로 정 회장과 임직원, 소비자 그룹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진행하고, 기업이념을 담은 많은 네이밍과 디자인 시안을 내놓았지만, 흡족한 것은 없었다. 대표 브랜드인 베지밀을 앞세운 제안, 의인(義人)이 만든 음식이라는 뜻의 네이밍, 베지밀의 어원처럼 두유에서 확장된 철학을 표출하는 네이밍, 세계화와 사업의 확장을 위해서 알파벳 약자를 담은 네이밍, 현대적으로 정식품을 재해석한 네이밍, 사내 공모를 통한 네이밍까지 십수가지의 제안서가 회의석을 지나쳐갔다.

하지만 현대적 브랜딩에 치우치다보니 정 명예회장이 전하고자 했던 기업이념과는 오히려 동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병들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음식으로 건강한 식생활을 만들어 주고자 한다.”

〃 정성수 회장 인터뷰 중에서 2012.05.08

디자인도 처음부터 되돌려봤다. 정식품이 어디에서 출발했는가? 소비자가 쉽게 부르고 많이 팔리기 위한 브랜딩이 목적이 아니었다. 사람을 살리는 음식을 만들고자했던 의사의 고민에서 출발했다. 그 정직하고 착한 마음을 담은 정+식품의 네이밍이 `정`의 정통성이 가장 부각된다는 새삼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겉모습의 혁신적 변화보다는 정식품의 브랜드 로열티를 존중해 기존의 이미지를 수정, 보완하는 방향으로 풀기로 했다. 그 때 떠오른 것이 바로 한국철학의 기본정신인 `천·지·인`이다. 사람이 우주와 대자연의 중심에 있다는 `천·지·인` 사상은 사람의 생명, 건강을 기업경영의 중심에 두는 정식품의 정신에 부합했다. 나아가 국민건강증진을 위한 정식품의 예방의학 노력을 표현하는 형상으로 적합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하늘을 뜻하는 좌측의 파란색 원과 땅을 뜻하는 우측의 적갈색 사각형, 가운데에 사람을 상징하는 녹색 삼각형을 배치했다. 여기에 정식품의 영문표기인 `Dr. Chung`s Food`를 하단에 함께 위치, 인간을 중심에 놓은 의사의 고민에서 시작한 기업의 정통성을 나타냈다.

새로운 CI 디자인과 함께 `의인의 뜻`을 바로 알릴 수 있는 슬로건도 개발했다. 의사가 아닌, 의인의 정신을 이야기 하고 싶었다. 바로 `의인의 뜻을 담습니다`와 `RIGHT PERSON, RIGHT FOOD`가 그것이다. 기업이 본래 가진 깊은 철학을 화장으로 퇴색시키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지어내고, 가장 `정식품스러운` 문장들로 고안했다. 오래된 중견기업들이 그러하듯, 정식품 역시 디자인 제작물들의 관리와 통제가 부족했다. CI 작업 마무리로 제공된 매뉴얼을 통해 기업의 아이덴티티를 오랜 기간 잘 관리할 수 있게 했다.

브랜딩 목적에는 사람들에게 쉽고 효과적으로 이름을 각인시키고 판매를 유도하는 것도 있다. 정식품은 좋은 의도를 가진 기업 이념을 소비자에게 잘 전달해 그 정신을 널리 알리는 것에 치중했다. 디자인을 하는 나마저 사람을 위해서 좋은 하늘과 좋은 땅에서 콩을 키우고 담는 의인의 마음에 몰입해 소비자의 건강을 생각하는 착한 마음으로 새로운 CI를 만들 수 있었다.

김영세 이노디자인 회장 twitter@YoungSe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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