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보드와 마우스가 PC를 조작하는 입력장치로 자리잡은 지 수십 년이 흘렀지만 기본적인 형태와 역할은 대동소이하다. 특히 아이콘을 조작하는 마우스와 달리 주로 글씨를 입력하는 키보드는 비싼 제품을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
하지만 최근 ‘키보드 르네상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다기능 키보드를 내놓은 업체가 있다. 아이프로스아이앤씨(www.iprokbd.com)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 회사 원학재 대표이사는 “키보드 하나만 바꿔도 책상 위 공간은 줄이면서 업무 효율은 높아지는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 속내를 들어 봤다.
◇ ‘조그셔틀 달린 키보드가 없다?’ = 대우전자·TG삼보 등 국내 주요 업체 구매담당 임원을 지냈던 원 대표는 경력을 살려 10년 전 독립한 후 각종 IT 부품 구매대행 업무를 진행하는 회사인 아이프로스아이앤씨를 세웠다. 그런 그가 갑자기 키보드를 내놓은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3년 전에 동영상 편집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한 업체에서 편집을 보다 쉽게 할 수 있는 키보드가 없냐고 하더군요. 그런데 시장을 찾아보니 조그셔틀이 붙은 키보드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왕에 하는 것 한 번 만들어보자고 생각해서 전문가들하고 함께 만들어 봤죠. 결국 그 업체는 소프트웨어와 키보드 조합으로 대통령상까지 받았습니다” 평소 ‘고유 브랜드를 가지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던 원 대표는 여기에서 자신감을 얻고 독자 브랜드를 가진 키보드 개발에 나섰다.
“PC가 처음 보급될 때만 해도 주로 1세대 입력장치인 키보드를 썼고 아이콘을 클릭해서 쓰는 시대가 오니 키보드에 더해 마우스를 썼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발전이 없지 않습니까? 특히 UCC 바람이 불면서 동영상 편집을 하려는 사람들의 수요는 많은데 이걸 적절히 처리해 줄 수 있는 장치는 없었어요. 그래서 키보드, 마우스 뿐만 아니라 조이스틱, 조그셔틀까지 통합한 장치를 만들어보자 하고 나섰죠.”
◇ 개발 과정은 ‘산 넘어 산’ = 하지만 막상 제품을 개발하려니 걸림돌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먼저 키보드를 만드는데 들어간 돈도 만만찮다. “보통 키보드 위에 글자를 새길 때는 레이저로 새기거나 실크스크린 인쇄를 합니다. 오래 쓰다 보면 벗겨지기 마련이죠. 하지만 오래 써도 안 벗겨지고 색이 안 지워지게 만들려고 하다 보니 ‘이중사출’ 기법을 쓰게 됐어요. 여기에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이중사출이란 키보드 키를 감싸는 키톱과 키톱 내부에 들어가는 플라스틱을 이중으로 만들어 꼭 맞물리게 만드는 방식을 가리킨다. 억지로 부수려고 하지 않는 한 키보드 수명이 다할 때까지 처음 상태를 그대로 유지한다. 하지만 이렇게 맞물린 다음에 오차가 없어야 하기 때문에 키 하나하나마다 틀(금형)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 원 대표는 ‘금형을 만드는 데만 억 단위가 넘는 비용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복병은 바로 소프트웨어였다. “이왕이면 여러 단축키를 마음대로 설정해서 쓸 수 있는 기능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결국은 보통 키보드 제조 업체라면 하지 않는 소프트웨어 개발까지 하게 됐죠. 이렇게 하드웨어·소프트웨어까지 모두 만들다 보니 시간이 더 오래 걸렸습니다.”
◇ 키보드부터 조그셔틀까지 “따로 또 같이” = 지난 2월 아이프로스아이앤씨가 출시한 입력장치 ‘레티스’는 기계식 키보드인 ‘에티스’와 조그셔틀·조이스틱을 통합한 장치인 ‘메이스’로 구성되어 있다. 착탈식으로 만들어져 키보드와 조그셔틀을 분리해 쓸 수 있고 키보드가 필요한 사람은 키보드만 사서 쓸 수 있다. 키를 눌러 보니 소음 없이 조용하게 눌리는 데다 손끝에 와닿는 느낌도 사뭇 다르다. 독일 체리사 키스위치를 써서 소음은 줄이고 내구성은 높였다는 게 원 대표의 설명이다.
특이한 점은 또 있다. 어두운 곳에서 타이핑을 도와주는 백라이트가 3단계로 조절되는 데다 ‘오피스’ 모드 버튼을 누르면 F1~F12키에 자르기, 복사하기, 붙이기 등 기능이 지정된다. ‘게임’모드를 누르면 일인칭시점슈팅게임에서 자주 쓰는 ‘WASD’키만 색깔이 달라지고 윈도 키는 아예 먹통이 된다. 실수로 윈도 키를 눌렀다 게임에서 튕겨 나가는 불상사를 막은 것이다. 여기에 캡스록, 스크롤록, 시프트 등 여러 기능키를 누를 때마다 백라이트 색상이 바뀌어 초보자의 실수도 막는다. PC 2대에서 키보드 한 대를 동시에 쓸 수 있는 듀얼 기능으로 공간을 절약하는 데도 좋다.
에티스 키보드에 조그셔틀·조이스틱을 통합한 장치인 ‘메이스’를 끼우면 키보드 하나로 조이스틱과 마우스까지 모두 처리할 수 있다. 버튼을 눌러서 모드만 바꾸면 조이스틱을 마우스나 방향키로 쓸 수 있다. PDF 파일을 읽을 때 필요한 프로그램인 아크로뱃 리더를 실행한 다음 오른쪽에 달린 조그다이얼을 돌리니 띄워 놓은 PDF 파일이 자동으로 돌아간다. 확대·축소도 자유롭다.
왼쪽 조이스틱 위에 달린 LCD 화면에는 현재 단축키를 지정한 프로그램 아이콘이 나타나 알아보기도 쉽다. 이렇게 지정된 기능은 키보드에 딸려오는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입맛에 맞게 언제든지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 LCD 화면에 나타나는 프로그램 아이콘이 마음에 안 든다면 연예인 사진이나 가족 사진으로 바꿔도 된다.
◇ 해외 정조준, 스마트기기 시장도 노린다 = 레티스의 활용 용도는 무궁무진하다. 키보드와 마우스만 가지고 동영상을 편집하는 데 불편함을 겪었던 아마추어 뿐만 아니라 동영상을 편집해야 하는 방송국, 혹은 여러 화면을 동시에 감시하고 빈번하게 화면을 앞뒤로 돌려 보아야 하는 각종 상황실이나 국방 분야에도 쓸 수 있다. 반응속도가 빠르고 키 스위치 수명이 길어 게임 마니아도 눈독을 들일 만한 제품이다. 실제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
“체험단을 모집했는데 대학교 방송국에서 편집을 담당한 학생이 신청했더군요. 키보드부터 시작해서 조이스틱, 마우스, 조그셔틀 할 것 없이 다 올려놓고 쓰기 때문에 공간은 공간대로 잡아먹고 돈도 만만찮게 들어서 불편했는데 가격이 기존의 절반에 공간도 줄여주기 때문에 써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출시 시기가 늦은 탓도 있어서 아직은 제품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편이다. 이 때문에 원 대표는 되도록 많은 채널을 통해 제품을 소개할 계획이다. 이미 온라인 오픈마켓에서 제품 판매가 시작됐고 3월부터는 오프라인에서 레티스 키보드를 만날 수 있다. 중국을 시작으로 미국, 유럽에도 제품을 판매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중국 시장에 제품을 출시할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복제품 문제다. 하지만 원 대표는 ‘제품 복제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유를 들어보자. “먼저 이중사출 키캡을 베끼기 쉽지 않을 겁니다. 거기다가 키보드와 마우스, 조이스틱, 조그셔틀처럼 여러가지 기능이 한데 엮여 있어서 쉽게 베끼기는 어려울 겁니다. 중국 현지에서도 키보드는 많은 비용을 들여 베낄만한 제품이 아니라는 인식이 있습니다”
올해 매출 목표도 물어 보았다. “올해가 출시 첫 해고 조금 불투명한 면이 있지만 국내·해외시장을 포함해 액수로는 30억, 대수로는 1만 대 정도를 판매하기로 목표를 세웠습니다. PC·노트북용 제품 뿐만 아니라 스마트폰·태블릿용 제품도 곧 출시할 겁니다. 두께는 줄이고 페어링 가능한 기기는 250개까지 늘렸죠. 기능키에 따라 색상이 바뀌는 백라이트 기능도 담아 반응이 좋을 것으로 예상합니다”